뮤지션 인 원더랜드 : 음대 학위로 CBS 엔지니어 되기

뮤지션 인 원더랜드 : 음대 학위로 CBS 엔지니어 되기

228
0

김광성 CBS 디지털기술국 제작기술부 사원

“플랜B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
“무직(musik, 독일어로 ‘음악’) 전공이니 무직(無職)일 수밖에 없지”

취업준비생 시절 친구들에게서 들었던 말입니다. 음대를 졸업하고 방송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한다는 게 워낙 드문 일이라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하지만 온갖 우려와 선입견을 뚫고 저는 CBS 입사에 성공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해금을 전공한 엔지니어입니다. ‘창사 이래 최초’, 입사만 했을 뿐인데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수식어가 붙어 버렸습니다. 엔지니어 선배들과 동료들을 한명 한명 떠올려 보니 물리교육과 출신 선배 한 명을 빼면 모두가 공대 출신인 걸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채용을 위한 면접 과정에서는 “전공 분야가 너무 다른데 잘할 수 있겠냐”는 질문과 그 질문의 응용이 변주되듯 쏟아졌고, 입사 이후 동기들, 선배들과의 대화에서도 제가 음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모두가 놀라며 ‘왜’, ‘어떻게’로 시작하는 질문들을 다다다 쏟아냈습니다. 입사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얼마 전에도 저와 관련된 소문을 들은 PD 선배 한 명이 놀란 얼굴로 “네가 해금을 전공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하고 갔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가 된 기분입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지금까지 엔지니어로서 일하면서 경험한 것들이 연주자였을 때의 감각들과 상당 부분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해금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에게 제 전공인 해금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전직 연주자가 어떤 자세로 엔지니어로서 일하고 있는지 보여 드릴 생각입니다. 욕심을 조금 더 부려 보자면, 이 글이 위의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저처럼 특이한 이력을 가진 취업준비생들께는 격려문으로, 채용을 담당하고 계신 분들께는 ‘우리도 잘할 수 있다’는 내용의 호소문으로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라디오 제작 업무 중
라디오 제작 업무 중


앨리스의 원칙은 이상한 나라에서도 통한다

해금 연주자였을 때 ‘좋은 연주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좋은 연주자들을 만나고 느낀 점, 스스로 생각해 본 것들을 정리하고 나니 몇 가지가 꼽혔습니다.

듣기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를 구별해내고 가급적 좋은 소리를 내도록 할 것, 악기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을 것,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악기를 관리하고 필요 시 수리할 것, 합주나 협업을 위해 적절히 의사소통할 것,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늘 깨어 있을 것.

이 원칙들에는 해금 연주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를 전공한 연주자들도 공감할 것입니다. 단어 몇 개만 바꾸고 다듬는다면 라디오 엔지니어에게도 유용한 지침들이 될 것입니다. 앨리스의 원칙이 이상한 나라에서도 통하는 순간입니다.

보고 들으며 소리 다듬기
연주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소리가 적절하고 완성도 있는 소리인지 판별해내기 위해 좋은 귀를 가져야 합니다. 엔지니어에게는 다행히 두 귀뿐만 아니라 소리의 레벨이나 스펙트럼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를 듣거나 볼 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들리는 소리가 부적절하다면, 어떻게 해야 원하는 소리로 가공해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방법을 알아낸 다음엔 그 방법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주자가 연주와 동시에 소리를 들으며 음정을 맞추고 분위기에 따라 음색과 음량에 변화를 주며 연주하는 것처럼, 라디오 엔지니어는 스피커와 레벨미터 등으로 소리를 듣고 보며 장비를 조작해 음색과 레벨 등을 적절한 수준으로 조절해야 합니다.
해금을 처음 접하고 나서 오랫동안 무대에 오르지 못할 수준의 실력으로 연습만 했듯, 입사 이후 수습 기간에는 한동안 방송 장비들에 대해 배우고 조작법을 익히고 연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생방송을 맡고 있는 지금은, 비유하자면 ‘방송 가청권역을 무대로 CBS 표준FM을 연주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KOBA 현장에서
KOBA 현장에서


구조를 이해하고 관리하기

좋은 연주를 위해 ‘좋은 귀’로 듣고 성실히 연습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악기를 연주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연주자가 악기의 관리, 심지어 수리에도 직접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많은 연주자들이 자기 악기를 관리하고 수리하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들입니다. 그렇게 원하는 음색을 위해, 악기를 자기 몸에 맞게 개조하기 위해 악기의 구조에 대해 공부하고 악기를 관리하고 직접 수리하다 보면, 악기에 생긴 사소한 문제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제 악기 가방에는 활에 칠하는 송진, 악보뿐만 아니라 여분의 현과 주아(周兒, 줄감개, peg), 복판(울림판)을 갈아내기 위한 사포까지 들어있습니다.
해금을 연주할 때, 현을 누를 때마다 ‘끽’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던 적이 있습니다. 악기를 수리하는 방법은 엔지니어가 시스템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닮았습니다. 현을 누를 때마다 소리가 났던 걸 보면 현과 맞닿는 부분은 모두 문제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있고, 소리가 나는 과정에서 진동이 전달되는 다른 부분들도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줄감개인 ‘주아’와 ‘원산(遠山, 울림판에 현의 진동을 전달하는 브리지)’을 먼저 떠올립니다. 현에 직접 닿는 부품들입니다. 이 부품들을 각각 교체해 보면서 연주를 해 봅니다. 해결되지 않으면 해당 부품들이 악기 본체와 닿는 부분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면서 원인을 확인하고 문제를 해결합니다. 원인을 파악하는 데 악기의 소리에 대한 경험과 직관이 유용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라디오 뉴스를 생방송으로 제작하다가 아나운서의 음성이 이상하게 들렸던 적이 있습니다. 해금에 문제가 생겼을 때처럼 차근차근 접근했습니다. 마이크, 마이크와 연결된 케이블, 케이블의 반대쪽 끝에 있는 오디오 믹서의 한 입력 채널, 오디오 소스가 거쳐 가는 오디오 믹서 내부의 회로들, 오디오 믹서와 파워앰프를 잇는 케이블, 파워앰프, 스피커와 그 사이에 있는 케이블 등 운 좋게도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마이크를 교체하고 테스트를 해 보니 소리가 괜찮았습니다.

협업을 위해 적절하게 의사소통하기
연주는 곡의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일종의 협업입니다. 작곡한 사람의 의도와 연주자 본인의 경험, 느낌, 연주 스킬을 섞어 소리로 만들어내는 작업입니다. 작곡가가 없는 즉흥연주라고 해도 연주자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독창적인 즉흥연주라고 하더라도 음악 사조나 음악적 경향을 배제한 채로 성립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합주를 하거나 공연을 준비할 때는 어떻겠습니까. 연주자는 다른 연주자들과는 물론이고, 작곡가나 예술감독 등과 곡에 대해, 무대 등/퇴장에 대해, 음향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할 때 전문용어를 남발하거나 막연한 표현을 쓰면 대화에 장애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무대 조명에 대해 고민하는 조명감독에게 곡의 분위기에 대해 설명하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연주자가 곡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 곡에 쓰인 음계와 리듬, 그와 관련된 예술 사조와 음악사에 대해 달달 읊거나, “어쨌든 슬픈데 좋아요” 쯤으로 설명을 끝내버린다면, 그 조명감독은 더이상 그 연주자와 대화하기를 꺼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말이 잘 통하고 일을 잘하는’ 사람들과 일하려고, 또 스스로 ‘말이 잘 통하고 연주를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방송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스템을 설계하고 라디오 부스 안에 있는 장비들을 관리하지만,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마이크에 대고 방송에 나갈 목소리를 내는 일은 다른 직군 동료들의 몫입니다. 다른 직군의 동료들과 대화할 때 기술이나 장비에 대해 얘기할 수 있지만, 전문용어를 남발하거나 막연한 표현을 써서 의사소통을 어렵게 한다면, 좋은 협업이 되긴 어려울 것입니다. 가령 한 라디오 부스에서 쓰던 다이내믹 마이크를 콘덴서 마이크로 교체했다고 합시다. 그 부스에서 방송을 진행하던, 마이크에 대해 궁금해하는 아나운서에게 다이내믹 마이크와 콘덴서 마이크에서 소리가 전기 신호로 바뀌는 과정을 줄줄이 설명하려 들거나, “마이크 비싸니까 조심해”로 설명을 갈음한다면 좋은 대화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전시회 오픈 기념 연주
전시회 오픈 기념 연주
제작 스튜디오에서 실습
제작 스튜디오에서 실습

깨어 있는 자세로 새로움을 맞이하기
많은 위대한 예술적 진보들도 처음에는 ‘추하다’, ‘잡스럽다’, ‘퇴폐적이다’와 같은 비난을 받는 문제작들로 시작됐습니다. 예술사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그 문제작들이 서서히 인정받거나 버려지는 과정, 또는 반대로 시대의 흐름이 새로운 경향들을 견인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주자들은 음악의 역사와 끝없이 상호작용하며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연주 기법 하나에도 그 악기가 발명된 이래로 악기를 연주해온 연주자들의 시행착오와 경험, 노하우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청중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속도가 빨라진 지금은 연주자들도 더 빨리, 자주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새로운 음계, 리듬, 새로운 주법에 적응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런 변화를 직접 만들어내기 위해 역사적 흐름이나 몸담고 있는 사회의 상황, 영감의 재료가 될 여타 분야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겁니다. 저도 한때 아티스트 행세를 제대로 하고 싶어 노력해봤지만 아쉽게도 자아도취가 가능한 수준으로 훌륭한 아티스트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깨어 있는 자세로 끊임없이 새로움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연주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기본자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지겨워지기까지 한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이라는 말이 우리 엔지니어들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건, 이 말이 가진 식상함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로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이 우리들로 하여금 늘 새로운 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신기술을 적용하도록 압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가지 매체나 기술에 대해서만 공부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 안락한 나태와 익숙한 올드스쿨로부터 엔지니어들을 도서관으로, <방송과기술>을 파는 서가로, 신기술 주제 세미나로, 모질도록 변화무쌍한 현실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일례로 CBS 시사프로그램 <김현정의 뉴스쇼>는 전통적인 AM과 FM 라디오뿐만 아니라 레인보우 앱을 통해 IP 기반으로 스트리밍되고 있고, 심지어 최근에는 YouTube 실시간 스트리밍을 통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스템을 관리하는 데만도 공부해야 할 것이 쌓이고 쌓였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미디어 환경을 급변시키고 말’ 사회적 변화와 신기술 개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행히 제게는 이런 변화에 발맞춰 공부하는 과정이 꽤 즐겁게 느껴집니다. 새로운 예술 사조나 경향을 접하는 것처럼 설레기도 합니다.

끝내며
이 글을 제게 의뢰한 엔지니어 선배가 <방송과기술>에 글을 기고해보지 않겠냐는 말과 함께 제안한 주제 중 하나로 ‘방송사 공채 합격 수기’가 있었습니다. 저 또한 최악의 청년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지금이니만큼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여러 분들께 글을 통해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취업준비 과정에서 만난 거의 모두가 공대 출신이었고, 제가 경험한 공채는 그들의 공채와 너무 달랐습니다. 방송기술 분야 취업준비생에게 제 경험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그 경험들을 열거한 형태의 ‘합격 수기’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합격 수기’를 쓰지 못한 아쉬움을 담아, 취업준비생 여러분께 드리는 말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공대 출신 친구들이 가볍게 응시해서 간단하게 취득했을 무선설비기사 자격증만 해도, 저는 다른 기사 자격증이 없으면 응시자격조차 가질 수 없었습니다. 높은 취업 문턱을 넘는 데 음대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핸디캡으로만 느껴졌습니다. “전공 분야는 다르지만 잘할 수 있다”는 말의 근거를 위해 끝없이 발버둥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합격 통보를 받은 건 “전공 분야가 다르니까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아직까지는 이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연주자로서 경험한 일들과 그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성향들은 제 발목을 잡기는커녕 크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CBS에 입사해서 일하는 동안, 위에서 쓴 연주자 시절의 원칙들은 폐기되지 않았고, 적절히 변형돼서는 오히려 훌륭한 지침들이 됐습니다. 어떤 면도 함부로 단점이나 핸디캡으로 규정하고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겠다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많은 합격 수기들은 “자격증을 취득하고, 자기소개서를 성의 있게 쓰고, 시험과 면접을 열심히 준비했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저는 조금 다른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핸디캡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도 끌어안으면 장점이 될 수 있다”, “자신을 스스로 믿으면 남들도 믿어줄 거다”라고요.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