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생활의 균형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 꿈이 아닌 현실로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 꿈이 아닌 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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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빈 전국언론노동조합 특임부위원장

저녁 있는 삶은 가능할까
20년 전 프랑스로 첫 해외 출장을 갔을 때 일이다. 오후 7시쯤 샤를 드골 공항에 내린 뒤, 버스로 30여 분을 달려 숙소인 파리 외곽 작은 호텔에 도착했다. 6월 초인데도 해는 아직 높이 떠 있었다. 가이드는 서머타임 때문에 오후 9시가 넘어야 해가 진다며 어두워질 때까지 숙소 주변을 둘러보자고 제안했다. 시간을 공짜로 번 것 같아 흔쾌히 동의했다. 기왕이면 가까운 카페에 들려 에스프레소도 한 잔 마시고 싶다고 했다. 가이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파리에선 서울처럼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곳을 찾기 힘들어요.”
그의 말처럼 호텔 주변 가게들은 이미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해지기 전에 가게 문을 닫다니. 망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불편할 텐데….’ 그러고 보니 평일임에도 거리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해외여행이라곤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야근과 술자리가 일상이던 2년 차 기자에겐 모든 게 낯설고 이상했다. 프랑스인은 일반적으로 오후 6시가 되기 전에 퇴근해 가족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낸다는 가이드의 얘길 듣고서야 의아함이 사라졌다. 당시 프랑스의 법정 노동시간은 1주 39시간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여전히 세계 최장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2024시간)은 35개 회원국 중 멕시코(2257.4시간)에 이어 2위로, OECD 평균(1759시간)과 265시간이나 차이가 났다.
언론노동자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월 발표한 ‘언론인 의식 조사’(전국 256개 언론사 기자 1677명)에 따르면 하루 평균 10시간 5분을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지상파 방송산업 노동실태조사’(수행 기관 : 언론정보학회, 2017년 기준)에선 지상파 방송종사자의 1주 평균 업무 시간이 61.2시간에 달했다. 통계치로는 신문, 방송 모두 1주 최장 노동시간을 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노동시간과 차이가 크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과로 사회인 대한민국의 대표 업종을 꼽으라면 신문과 방송사 모두 결코 순위권에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개정 근기법 핵심 ‘7·40·12’
전국언론노동조합(이하 언론노조)은 지난 2월 말 개정 근기법이 국회를 통과되자, 곧바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개정 근기법의 바뀐 내용은 크게 3가지다. ▲1주는 휴일을 포함한 7일이며(제2조) ▲휴게시간을 제외한 평균 노동시간은 1일 8시간, 1주 40시간을 넘길 수 없다(제50조). ▲연장 노동시간은 반드시 노동자와 사용자가 합의해야 하며 주당 12시간을 초과하면 안 된다(제53조).
여기에 방송사가 노동시간 단축 예외 업종에 해당하는 특례업종(제59조)에서 제외됨에 따라 지상파 방송사 모두 7월 1일부터 노동시간을 1주 최대 68시간으로 단축해야 했다. [표 1 참조]

표 1.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개정 근기법의 주요 조항
표 1.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개정 근기법의 주요 조항

신문, 두 번의 실패는 없다
법규국과 정책실뿐 아니라 임원까지 매달려 새로 바뀐 법 조항을 스터디하고, 전국 130개 사업장을 두 달여 간 돌며 조합원을 만났다. 올해 적용 대상인 300인 이상 규모의 신문 조직과 방송사 지본부장을 대상으로 노사 협의를 준비하기 위한 간담회도 조직했다. 신문사의 경우 국민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한국일보, 한겨레, 헤럴드에 뉴스통신사인 연합뉴스까지 올해 시행 대상 조직인 7곳의 노조 대표들이 4월 11일 첫 모임을 가졌다. 방송은 KBS, MBC, EBS, SBS 등 지상파 4사와 산별 교섭을 통해 노동시간 단축 문제를 논의하기로 하고 6월부터 협의를 시작했다.
개정 근기법 내용을 처음 접한 현장 조합원들의 반응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간담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취재와 방송 제작 현장을 뛰어다니다 보면 과로사 기준(주당 60시간)을 넘기기 일쑤인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반기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현실 속에서 과연 법 적용을 할 수 있겠냐는 반문이 쏟아졌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주당 최대 노동시간 안에 정치인들의 조찬 모임 취재에서부터 취재원과의 저녁 미팅까지 소화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예능 프로그램은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조합원들은 밤 세워 촬영하고, 편집을 해도 방송 시간을 맞추기 힘든 현실을 토로했다. 개별 노동시간을 파악하는 것도 문제였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개인별 정확한 업무 시간 파악은 필수다. 그런데 신문사나 방송사 어느 곳도 개인별 노동시간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노동시간 단위가 아닌 기사나 프로그램 등 콘텐츠 단위로 업무 시간을 구분하다 보니 노동자 개인이 정확한 노동시간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방송, 첫 단추를 잘 잠가야
6월 시작된 지상파 방송사와 언론노조의 산별교섭에선 노동시간 단축 등을 의제로 한 제작환경개선분과와 방송공정분과, 방송산업진흥분과 등 3개 분야에서 협의가 진행 중이다.
9월 초 타결을 목표로 한 이번 교섭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최대 화두였다. 보도국은 신문사의 노동시간 단축 논의를 참고해 진행이 가능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전망됐다. 그러나 드라마, 예능,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작은 시작부터 난항이 예고됐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근기법 개정 이전부터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으로 인한 사고가 있었기에 사회적 관심도 높았다. 언론노조 소속 각 방송본부의 노동시간 단축 의지는 높았지만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 더 많은 아이디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개정 근기법이 시행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지만 방송사의 제작 현장은 아직도 주당 최장 68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법 위반에 대한 조사를 6개월간 유예하기로 했지만, 명백히 법률 위반이다. 특례업종 제외로 처음 맞는 노동시간 단축 논의라고 해도 현재 상황은 기대에 못 미친다. MBC 본부가 지난 7일부터 9일까지 조합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초과노동 실태 설문조사’에선 7월 1일 이후에도 주 68시간을 넘겨 일을 했다는 응답률이 16%나 됐다. 직종별로는 PD가 40%로 가장 높았다. 이어 기자와 제작카메라가 각각 29%와 14%로 높게 나타났다. 방송사들은 한목소리로 현재의 편성 체제에서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인력의 노동시간 단축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종편과 CATV 채널 등과의 경쟁 때문에 드라마 시간이나 주당 방송 횟수를 줄이기도 쉽지 않다.
언론노조는 드라마나 예능, 다큐 프로그램의 경우 원칙적으로 사전 제작 시스템 도입을 통해 노동시간 단축을 목표로 삼았다. 다만 한꺼번에 모든 프로그램을 사전 제작할 수 없기에 단계적인 노동 환경 개선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 있다. 드라마나 다큐 등의 제작 여건상 신문사보다 다양한 유연근로시간제 도입이 불가피한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재량근로시간제나 법 규정에 없는 6개월 단위 탄력적 근로시간제 도입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밝힌 상태다.

멀고 힘들수록 함께 가야 할 길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개정 근기법이 적용된 지도 2개월이 지나가고 있다. 그간의 협상에서 사측도 언론노동자의 과도한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법률 위반은 다른 문제다. 과연 언론노조 산하의 신문사와 방송사 중 한 곳이라도 개정 근기법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조합원들의 불만을 보면 굳이 묻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가야 할 길이 먼 상황에서 다시 프랑스의 사례를 짚어 본다.
프랑스는 노동 복지 선진국이다. 파리 출장을 갔던 1998년 제정된 ‘오브리법(근로시간 단축 지도촉진법)’은 이 나라의 노동 복지 수준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 법령이다. 당시 사회고용장관인 마르틴 오브리의 이름을 딴 오브리법은 2000년 1월 1일부터 20인 이상 사업체가 임금 삭감 없이 노동 시간을 1주 39시간에서 35시간으로 단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이 법의 도입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동시에 신규 채용을 통해 실업률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사업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5년간 신규 채용 인력에 대한 임금 지원 등 대책도 꼼꼼히 세웠다. 반면 법 제정에 반대하는 기업의 목소리는 높았다. 실업률마저 끌어내리지 못함으로써 일자리 나눔과 관련해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비난을 현재까지 받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법 개정 전부터 기업과 야당 국회의원들의 반대가 심했다. 오브리법은 실패한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법안 내용이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자. 과로 사회임을 인정하고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지만 노동자만큼 모두가 깊은 고민을 했을까? 노사는 물론 정부와 정치인 모두 한목소리로 노동시간 단축을 외치고 머리를 맞댄다면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에선 실패한 오브리법이라도 우리는 성공적인 법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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