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문명이 만났을 때
EBS UHD 다큐멘터리 시리즈 ‘5원소, 문명의 기원’ 제작기
오정호 EBS 교육다큐부 PD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제작자의 지적인 호기심, 모호한 열정,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땀과 다양한 기술이 투입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에 그 프로그램은 신호가 되어 특정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에게로 뿌려집니다. 플랫폼과 채널은 다양해지고 최첨단 영상 제작 기술이 도입되는 시대이지만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업은 여전히 인간의 끝없는 노동과 수고로움을 전제로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제작기라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땀, 그리고 기다림에 대한 기록일 것입니다.
먼저 간단하게 제 프로그램을 소개해드리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BS UHD 다큐멘터리 시리즈 <5원소 – 문명의 기원>은 이미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소재에서 출발했습니다. 나무, 흙, 물, 철, 불이라는 다섯 가지 원소가 우리 인간과 어떻게 만났고 어떤 공학과 기술로 확장되었으며 어떤 식으로 현대 최첨단의 세계에서도 문명의 뿌리로 그 역할을 하는지 고품격 영상을 통해 그 모습을 보여주는 문명사 다큐멘터리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에 좀 독특한 점이 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사건들은 하나의 점들이고 그 점들을 하나의 테마 아래 이어 나가는 빅 히스토리(big history)적 스토리텔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2016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KCA) 경쟁력 강화 부문 선정작으로 제작비를 지원받았고 중국 후난방송 다큐멘터리 채널인 골든 이글 다큐멘터리 채널(GEDC, 이하 GEDC)과 공동제작한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2016년 말부터 사드 문제로 인해 한-중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예상했던 제작 기간보다 길어지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지난 2018년 6월 기획했던 다섯 편이 모두 성공적으로 방송되었습니다.
프로그램 제작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습니다. 중국 측 파트너인 GEDC와의 실무협의를 위해 중국을 십여 차례 드나들었고 하루 평균 12시간이 넘는 마라톤협상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빅뱅 차이나> 10부작을 통해 호흡을 맞췄던 방송사이기는 하지만 제작비 설계, 스텝 구성, 제작비 집행과 정산, 촬영, 편집, 방송과 홍보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 모듈에서 원칙과 기준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번 그 합의 사항을 한국어와 중국어로 번역하여 그 자리에서 주고받았습니다. 지리한 협상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언어의 장벽뿐만 아니라 방송에 대한 이해, 심지어는 역사관까지 우리와 중국은 다른 존재들이었습니다. 방송이 국가 간의 간극을 좁히는 작업인지 아니면 그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절감하는 경험인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그들과의 촬영과 편집은 비교적 쉬운 작업이었습니다. 영상이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5원소 -문명의 기원>은 <불멸의 진시황>, <빅뱅 차이나>에 이어 중국과 진행한 마지막 국제공동제작 프로젝트였습니다. 문제는 사드 정국으로 급랭한 한-중관계도 있었지만 프로그램 내용적으로 이 문명사 시리즈에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실크로드)라는 국가적 이니셔티브, 즉 중국이 세계 문명의 기원이었다는 국가적 자부심을 은근히 프로그램에 밀어 넣고 싶어 하는 중국 측의 고집이었습니다. 2015년 12월부터 현재까지 저는 세 번의 프로젝트를 통해 중국 국제공동제작의 밝음과 어둠을 경험했습니다. 어쨌든 제작자로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을 인정해야 같아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중국은 어려운 상대이지만 우리가 더 깊이 알아야 할 흥미로운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2016년 하반기 일부 촬영을 끝냈고 2017년 본격적인 자료조사와 프로그램 구성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세계 문명사 속에 공학, 과학, 기술의 역사를 넣다 보니 읽고 정리해야 할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너무 많은 소재들과 이야기가 오히려 촬영안 구성에 방해가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5원소-문명의기원>을 UHD로 기록함으로써 얻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촬영대상과 촬영지를 정리하다 보니 굉장히 많은 박물관 유물과 유적들이 리스트업되었습니다. 물, 불, 철 편만해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이 10개 이상이 되었습니다. 터키의 카파도키아 계곡과 넴루트산 거대 두상, 인류 최초의 철기를 만든 하튜샤 지역,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이란의 카나트 우물,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 영국의 하드리아누스 방벽, 인도의 거대 계단식 우물, 일본의 고산수 등. 현존하는 최고의 영상 포맷으로 그것들을 촬영하는 작업은 방송 프로그램의 의미를 넘어 기록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장비가 크고 많다 보니 촬영허가를 받는 작업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촬영 전에도 섭외를 전담하는 별도의 로케이션 코디네이터를 두어 촬영료, 보험료, 저작권 등 많은 부분을 미리 정리하고 갔습니다. 사전 섭외가 완료된 이후에야 비로소 현지 코디네이터에게 그 바통을 넘겼습니다. 저만 해도 10여 개국 4개월 정도를 촬영을 다녔으니 이 촬영 코디네이터가 탄탄하게 뒷받침해주지 않았다면 전체 촬영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격적인 촬영은 2017년 9월부터 2018년 5월 초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최고의 영상을 구현하기 위해 저희 제작진이 선택한 메인 카메라는 아리(Arri)사의 아미라(Amira)였습니다. 렌즈와 부속 액세서리를 달면 엄청 무거워지는 쇳덩어리입니다. 아미라는 늘 차 안에서는 촬영감독 바로 옆에 앉았고 산으로 올라가다가 쉴 때도 제일 먼저 평평한 너럭바위를 차지하는 귀하신 몸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상한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났습니다. 촬영감독이 잠결에 끙끙대는 신음 소리였습니다. 아무런 내색 없이 그 무거운 아미라를 들고 촬영하던 그가 남몰래 아프다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못 듣고 자는 척했지만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숱한 불면의 밤과 기다림, 땀으로 축축한 속옷이 기억납니다. 영국의 미들랜드에서는 증기기관차가 지나가는 단 10초의 모습을 찍기 위해 비바람 속에서 이틀을 기다린 적도 있었고 인도에서는 공항 검색 공무원의 고집으로 다르질링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놓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3일 반을 달려 찾아간 카자흐스탄 아랄해에서는 원래 찍으려고 했던 고철 배가 이미 고철업자에게 팔려버렸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연출이나 데이터 매니저가 없었기 때문에 밤마다 촬영원본을 내리고 백업받는 작업은 오로지 제 차지였습니다. 보통 네다섯 시간이 걸렸습니다. 자다가 메모리를 갈아주고 다시 자야 했기 때문에 혼자 방을 쓸 때는 항상 불을 켜 두었습니다.
비교적 빡빡한 촬영일정이었기에 후반 작업 역시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습니다. UHD 촬영 원본 파일만 해도 수십 테라가 넘었기 때문에 파일 저장뿐만 아니라 변환, 편집, 색보정, 컴퓨터그래픽 렌더링 등에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영상을 위한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물론 UHD 영상 제작 기술이 앞으로 더욱 발전하겠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이 기술의 절반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새로운 기술이 방송 산업 전반에 뿌리내리려면 촬영, 편집, 송출, 수신 등의 모든 단계에서 기술 발전의 속도가 비슷해야 합니다. 기계로 생각하면 훨씬 쉽습니다. 카메라, 편집장비, 송출장비, TV모니터. 어느 한 단계라도 뒤처진다면 기술 생태계는 성숙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적 수월하게 자리 잡았던 HD 기술에 비해 UHD 기술은 여전히 정착 단계인 듯합니다. UHD 카메라는 너무 무겁고 촬영 원본 파일의 용량은 거대합니다. 편집 소프트웨어는 버거워하고 각종 장비 구입에 치르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UHD TV의 보급이 더디기 때문에 기술의 확산 속도 또한 정체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기술을 이용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인간의 보려고 하는 욕망을 극대화해주는 현존하는 최고의 영상 제작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촬영했던 대상들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아름답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중국의 타슈화 촬영이었습니다.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날씨, 저는 조용히 빛나고 있는 녹은 철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 불꽃놀이 화약을 살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은 고철 쪼가리를 녹였고 그 녹은 철물을 불꽃처럼 벽에 뿌렸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울트라 프라임렌즈가 장착된 레드 카메라에 영상이 맺혔습니다. 이야기도 아름다웠고 영상 또한 그러했습니다.
문명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거대한 유적이나 유물을 떠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 숨은 이름 없는 인간들의 숱한 시행착오와 노력, 지식 전달과 기록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면 현존하는 인류의 모든 최첨단 기술도 이곳에 없었을지 모릅니다. 프로그램 기획 당시 <5원소-문명의 기원>은 저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난 지금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지 아직도 모르지만요.
그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