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승환 & 하태림 ㈜로커스 PD
기대
영상기술의 태동과 함께 탄생한 다큐멘터리는 영화 그리고 TV와 함께 성장하고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도구로만 여겨졌던 ‘촬영’과 ‘편집’은 그 기술의 발전을 통해 하나의 다큐멘트(Document)로 인정받았고, 이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다양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마침내 경직된 현실의 재현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현실의 표면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진실을 포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픽기술의 발전도 다큐멘터리의 형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단순 재현을 위한 CG(Computer Graphics)의 활용에서 시작된 다큐멘터리 속 그래픽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현, 주관적 경험의 재현 등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되었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일각에서는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Animated Documentary) 등을 통해 하나의 형식으로도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VR 기술은 어떨까? ‘보는 것’에 그쳐 있던 기존 그래픽 기술들의 한계를 넘어서 주관적 경험을 높은 몰입도로 재현한다면 이 또한 하나의 주요한 다큐멘트가 될 수 있을까? 혹은 단순한 소재로써의 활용을 넘어서 새로운 다큐멘터리 형식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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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너를 만났다 3 : 엄마의 정원> 제작이 한창일 즈음, VR 저널리즘 <소방관을 만났다> 기획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전작인 <용균이를 만났다> 등 VR을 통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기에 보다 큰 규모로 기획이 되었고 다양한 기획이 가능했다. 여러 직업군과 사례들을 두고 고민이 있었지만, 몰입감이 높은 VR과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내며 저널리즘의 의의도 살릴 수 있는 2020년 군포 물류센터 화재 사건을 제작하기로 했다. 화재 현장 속 소방관들의 주관적 경험을 재구성하는 것이 그래픽 콘텐츠로써 다큐멘터리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고, 사회적으로 관심을 많이 받았던 화재 사건이었기에 그 화재 현장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 자체에도 큰 의미가 있었다.
화재 현장의 재현방식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했다. 욕심으로는 화재 발생 시점부터 화재진압 후의 상황까지 구현하고 싶었으나 제작 기간 및 예산 때문에 효율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이에 기획 의도를 살려 화재 발생 시점이자 가장 활발히 화재를 진압하는 오전 11시경, 화재가 거의 진압되어 마무리 단계인 밤 그리고 화재진압이 완료된 후인 이튿날 아침을 중심으로 제작하기로 결정됐다. 현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순간들을 VR에 담아내고자 했으며 소방관들의 기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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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공간의 배경은 군포 물류센터를 디지털트윈 방식으로 그대로 재현했다. 다행히 건물의 평면도를 제공받을 수 있었고 수월한 제작이 가능했다. 또한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 화재 전의 물류센터를 제작한 후 화재 발생 당시의 화재 확대 방향 등 구체적인 상황들을 반영해 불에 타고 있는 배경과 불에 탄 후의 배경 작업을 했다. 또한 당시 화재 현장에 있던 기저귀, 생리대, 키친타월, 물류박스, 플라스틱박스 등이 불에 탔을 때의 형태와 연소반응에 대해서도 각각의 특징을 살려서 디테일하게 표현했다.
공간은 크게 물류창고 1층, 계단, 5층 그리고 화재 폐허까지 네 가지 현장으로 제작했다. 1층은 앞서 언급했듯이 화재 발생 후 최성기의 불, 연기를 중점적으로 표현했고 불길이 옮겨붙고 점점 강해지며 철근, 콘크리트가 무너지고 랙이 쓰러지는 등 당시의 긴박하고 위험한 상황을 재현했다. 화재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후 퇴각하려고 할 때 간발의 차로 출구 쪽의 셔터가 내려앉는 장면은 실제 소방관분들이 경험했던 상황이기도 하다. 긴장되는 순간들 속에서 소방관들을 따라 가까스로 1층 화재 현장을 탈출하면 공간은 계단으로 이동한다.
계단 공간은 화재진압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인 밤으로 연출했다. 당장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 환경에서 폭포수처럼 내려오는 물을 거슬러 계단을 올라가는 소방관들의 어깨에는 건물 내부에 남아있는 작은 불길들을 진압할 소방호스가 들려있다. 창문 사이로 비치는 달빛에 의지해 계단을 오르고 나면 5층 내부로 진입하게 되는데 내부에는 아직 불길들이 남아있다. 5층은 살수차로 인해 정강이까지 진흙이 차올라 있어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 힘겹게 걸음을 옮겨 잔불 진화를 끝내고 탈출을 하려고 하면 연기투시랜턴의 배터리가 방전되더니 곧 산소통의 산소도 고갈되기 시작한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산소통 경고음에 쫓기며 출구 쪽으로 연결되어있는 호스를 부여잡고 진흙 속을 기어가다 보면 출구를 통해 마지막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마지막 공간, 화재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 후 폐허 한가운데에서는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소방관들에 대한 통계자료와 사진들이 보이고 끝으로 한 소방관의 뒷모습과 함께 ‘First In, Last Out’ 자막이 나오며 VR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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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X & Simulation
<소방관을 만났다>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를 하나 꼽으라면 ‘FX & Simulation’ 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화재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표현되어야 할 불과 연기를 비롯해 물과 진흙, 건물 붕괴 시뮬레이션까지 사실적인 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R&D가 필요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오프라인 랜더링을 거치면 끝이고 PC, 콘솔 게임이었다면 3D 파티클로 제작하면 끝이었겠지만 VR 디바이스의 제한된 환경에 맞춘 이펙트들을 제작하고 배치하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난관의 연속이었다.
화재 현장, 특히 1층 최성기의 화재를 표현하기 위해 파티클로 높은 퀄리티의 불 이펙트를 만들었으나 데이터가 무거워서 많이 배치할 수가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근경, 중경, 원경에 각기 다른 불 이펙트를 만들었다. 근경에는 파티클로 만든 높은 퀄리티의 이펙트 위주로 배치하고 중경, 원경에는 각각 상대적으로 가벼운 2D 이펙트들을 Camera Facing Plan을 통해 3D처럼 보이도록 배치했다. 이를 위해 DCC 툴에서 제작한 시뮬레이션의 Motion Vector Map을 따로 추출해서 텍스쳐로 만들어서 사용했고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 이펙트들은 파티클 시스템을 따로 거치지 않아도 되었기에 최적화 작업에도 용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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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3D 파티클로 제작하였는데 기본적으로 분사가 되는 형식이다 보니 많은 계산을 요구했다. 또한 불 이펙트에 닿으면 기화를 해야 하고 벽면에 닿으면 자연스럽게 흩어져야 했기에 퀄리티와 계산량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R&D를 거치며 여러 방면으로 테스트를 통해 맞춤 텍스처를 제작하게 되었고 물줄기 자체의 파티클 수를 줄여 계산량을 줄일 수 있었다. 물줄기 자체의 계산량을 줄이니 기화와 흩어지는 현상도 충분히 계산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보다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해졌다.
계단 공간에 배치된 물에 대한 연출진의 주문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잿물’이었다. VR 상에서 3D 파티클로 이것을 구현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 계단의 형태에 맞춘 더미 쉐이더를 제작해 잿물을 표현했다. 유체 시뮬레이션을 통해서도 이를 구현할 수 있었겠지만 실시간 계산의 안정성을 고려해 선택지에서 제외시켰다. 결과적으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잿물’에 대해서 다양한 수정요청이 들어왔을 때 비교적 수정이 쉬운 공정을 통해 아트 디렉팅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고 3D 파티클에 비해 떨어져 보일 수 있는 퀄리티는 라이팅과 디테일한 추가 쉐이더 이펙트 배치로 보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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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배치되어 현장감을 더해준 연기는 UE4에서 제공되는 Material Shader를 사용하여 제작하였으며 공간을 가득 채우는 연기는 Post Process를 통해 구현할 수 있었다. 또한 실제 화재 현장과 최대한 유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추가로 개별 쉐이더를 제작해서 연출적인 요소로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붕괴 시뮬레이션 작업에도 많은 공수가 들어갔다. 천장 구조물이 무너지면서 랙이 쓰러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했는데 혹시 모를 체험자의 안전사고를 고려해서 적당한 크기의 콘크리트를 떨어트리면 랙이 자연스럽게 쓰러지지 않았다. 이를 위해 3가지의 DCC 툴에서 다양한 시뮬레이션 조건을 검토하며 표현에 적합한 워크플로우를 구축하였고 여러 번의 시연 테스트를 통해 최적화 작업까지 마치며 안정적으로 VR 내에 붕괴 시뮬레이션을 구현해냈다.
이렇게 제작된 모든 이펙트 요소들은 사실적인 표현과 최적화 사이에서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통해 구현되었다. 또한 VR 콘텐츠 특성상 작업 PC의 화면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VR을 착용하고 볼 때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최대한 수정이 용이한 파이프라인과 워크플로우로 제작했다. 덕분에 연출진과 원활하게 소통하며 이펙트들의 배치를 바꾸고 전체적인 콘텐츠의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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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ion Capture
모션캡처는 VR에 사실감을 더할 중요한 요소다. 단순히 정해진 동작을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직 소방관의 현장 자문을 통해 모션캡처가 진행되었다. 현실적인 자문을 통해서 촬영 도중 배우의 동선을 수정하고 동작에 대한 디테일을 더하는 등 화재 현장 상황의 사실적인 재현을 위한 노력들이 더해졌다. 그 결과 소방관 캐릭터들은 실제 소방관들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움직일 수 있었으며 단순한 움직임뿐 아니라 소방관들의 작은 습관, 위험 상황에서의 대처하는 자세 등 구현하기 어려운 애니메이션을 구현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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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erience
14명의 체험자는 다큐멘터리 촬영과 함께 HMD를 쓰고 VR을 체험한다. VR 체험 전, 소방복을 입어보기도 하고 호스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짧은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이 수고스러운 경험은 저널리즘에 의해 구현된 VR에 당위성을 제공하고 VR이 하나의 주요한 다큐멘트로써 역할 하게 해준다. 체험자들은 취재와 탐사의 과정을 이해하고 경험하며 마침내 소방관들의 주관적인 경험을 체험하게 되고 이를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떤 사실들을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촬영과 체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몇몇 체험자가 VR에 몰입한 나머지 1층 내부가 무너지는 장면에서 탈출을 위해 뛰쳐나오는 과정에서 제작진이 제지하는 등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다행히 안전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체험 전과 후의 인터뷰를 통해서 VR이 체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소방관을 꿈꾸는 어떤 체험자에게는 꿈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고 수년 전 화재 사고를 그저 눈앞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체험자는 그 당시의 아픔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는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수년 전까지 현장에서 동료들과 소방 활동을 하던 한 체험자는 눈물을 흘리며 먼저 떠나간 동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스스로의 사명을 되새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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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과 다큐멘터리
VR의 가장 큰 강점은 몰입감에 있다. 이 강점을 영상 너머로 전달하기 위해 <소방관을 만났다>에서는 다큐멘터리의 객체이며 동시에 주체 역할을 하는 체험자를 활용했다. 2020년 군포 물류센터 화재 사건에 대한 소방관들의 경험을 재현한 VR과 이것을 체험하는 체험자는 다큐멘터리 내에서 상호소통하고 충돌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심도 있게 관찰하고 저널리즘적 의의를 끌어내는 것으로 VR 다큐멘터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렇듯 다큐멘터리에서 VR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그동안 그래픽과 애니메이션이 해오던 재현의 영역과 연극, 실험과 같은 체험의 영역을 VR 특유의 몰입감을 활용한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존 다큐멘터리들에 활용되었던 다른 소재들과는 차별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실제 다큐멘터리 촬영 소스, 녹음 소스를 VR에 접합시키거나 VR로만 구성된 다큐멘터리가 꾸준히 제작된다면 하나의 새로운 형식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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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다큐멘터리는 제작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소방관을 만났다>의 제작 과정을 통해 PD를 비롯한 제작진들은 소방관들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는지 다각도로 배우고 느껴볼 수 있었다. 그동안 매체를 통해서 다루어지던 모습들 이면의 그분들이 겪는 현실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소방관을 만났다>와 같이 VR을 활용한 다양한 시도가 다큐멘터리의 영역 내, 외로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다큐멘터리에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고 VR에는 그 형식적 층위를 축적해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VR 기술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상처를 치유하며 미래로 나아갈 가능성을 꾸준히 연구하고 시도하고 싶다. 우리의 삶을 통찰하고 사유하는 과정에 있어 핵심적인 기술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하기에.
마지막으로 체험자 중 한 사람이 이야기했듯, <소방관을 만났다>가 단순히 소방관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공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약하지만 이를 통해 실질적으로 화재를 예방하고 소방관들의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좋은 영향을 미쳐 모든 이들이 화재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