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넌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였다. 고등학생 때는 “어느 대학에 가고 싶니?” 대학생 때는 “졸업하고 어느 회사에 취직을 하고 싶니?” 였다. 하지만 입사를 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누구도 나에게 더 이상 “넌 꿈이 무엇이니?”, “넌 무엇이 되고 싶니?” 라고 묻지 않았다.
나의 꿈은 더는 누군가의 관심 대상이 되지 않았다.
靑春(청춘)의 사전적 의미는 만물(萬物)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① 십 대 후반(後半)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人生)의 젊은 나이 ② 또는, 그 시절(時節)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느 책에서 읽은 문구인데, 청춘의 또 다른 이름은 꿈을 포기하지 않음이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청춘인가 아닌가? 청춘이 아닌 나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눈부신 의학기술의 발전은 현대사회를 100세 시대로 만들었다. 보통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28세에 입사를 하고 30년 정도 회사에 다니면 58세쯤 퇴직을 한다. 100세 시대에 58세 정년으로 퇴직을 하면 삶의 60%를 산 것이다. 정년퇴직까지 인생의 60%를 살고 그 후 40%의 세월을 더 살아야 한다면, 꿈 없이 사는 40년의 인생은 과연 어떤 의미로 살게 될까. 그러한 삶의 의문 속에서 어느 날 선배님이 나에게 “버킷리스트”라는 책 한 권을 주었다. 나의 버킷리스트를 써서 보내라는 이야기와 함께. 하지만 받고 난 후 책을 읽어보았지만, 난 그 사실을 일상 속에서 잊고 살고 있었다.
아홉수에서 계란한판이 되었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마냥 세월만 보낸 것 같은데 어느 날 난 계란한판이 되었다. 어려서 난 상상하기를 좋아했었는데 그때 20대까지의 삶은 상상으로 가득 했었다. 하지만 30대 이후의 삶은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그만큼 30대는 나에게 의문투성이의 나이였다. 공자(孔子)가 30세에 자립(自立)하여 그 나이를 이립(而立)이라 하던데, 난 세워놓은 뜻도, 꿈도, 해놓은 것도 없이 공허하기만 했다. 어쩌면 20대까지 나의 꿈은 나의 뜻보다는 부모님의 바람으로, 사회의 시선으로 써 내려갔었다. 그 누군가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고 부모님에게 좋은 결과를 보여 드리고 싶어서 그동안 세워놓은 꿈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 같다. 회사에 다니며 사회의 일원이 되고 난 후 보통 사람의 보통의 목표를 이룬 나는 더 이상 꿈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꿈 없이 맞이한 30세 라는 나이는 그 앞에서 길을 잃게 만들기 충분했다.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꿈을 물었지만, 그동안 나만의 꿈을 담은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마라톤 같은 긴 삶 속에서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오늘, 갑작스럽게 죽어도 난 여한이 없을까? 아일랜드의 소설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I knew, if I str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난 지금 내가 꿈꿀 수 있는 꿈의 목록이 필요하다.
* 나의 꿈 리스트 하나
: 일 년에 한번 여행하기
난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 길 속에서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융프라우호의 아침햇살, 런던의 잔디밭에서 먹는 점심, 괌의 풀장에서 보는 노을, 서울 귀퉁이 아무도 없는 카페의 막 뽑은 커피 냄새. 이건 길을 해매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해외 배낭여행을 하다보면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떤 곳을 찾아 헤매는 일은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말로는 바로 대박 멘붕! 비는 내리고 배는 고픈데 지도에서는 분명 여기라고 하고, 하지만 내 눈엔 건물은 보이지는 않고. 그 주변에서 한숨을 돌리다 보면 기적적으로 바로 그 곳이 보인다. 마치 운명처럼. 그만큼 내가 살아있다고 마음 떨리게 느끼는 일은 여행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해외여행은 비행기 삯이 많이 드니까 일 년에 한번이면 충분하고 두 번이면 더 좋다. 하지만 언제든지 떠나는 동네 여행이나, 국내 여행도 좋다. 누군가에게 내가 사는 이곳도 한번쯤 오고 싶은 여행지 일 것이니까.
런던에서 찍은 공원 입구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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괌 사랑의 언덕에서 찍은 괌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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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새끼섬 앞에서 스쿠버 다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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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인터라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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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사원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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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있는 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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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가 녹음했던 런던의 에비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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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꿈 리스트 둘
: 새 악보를 보고, 기타 연주하기
악기를 배우고 연습하고 익숙해지는 일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러 악기를 두루두루 경험해본 결론은 기타와 피아노다. 피아노는 어려서 배웠지만 아직 잘 연주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다. 기타도 마찬가지다. 특히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건 참 어렵다. 매일매일 연습을 해야 느는 것이 악기인데, 바쁘다 보니 연습량이 줄고 지금은 간단한 코드 몇 개 정도만 가능하다. 악기를 연습하며 그것에 집중하다 보면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금방 풀린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곡을 거침없이 연주할 때의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은 부족한 실력이라, 피아노와 기타를 잘 다루게 되면 바이올린이나 첼로에도 도전하고 싶다.
* 나의 꿈 리스트 셋
: 수묵화 배우기
수묵화는 나이가 지긋해 지면 시작하고 싶어서 아직 아껴둔 나의 리스트다. 흰 종이에 비워가며 그림을 그리면 인생도 먹이 화선지에 지긋하게 퍼지는 것처럼 좀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것을 배울 때가 아닌 것 같다. 살다 보면 ‘이쯤이다’ 하는 느낌이 들 때 시작하고 싶다.
제주 소암 현중화 선생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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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꿈 리스트 넷
: 와이너리 방문하기
요즘 관심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와인인데, 피곤한 주말 여유로운 와인 한잔은 긴 쉼과 위로가 된다. 와인은 특히 즐거운 사람들과 마시면 그 맛이 배가 되는데, 어떤 와인을 마시는가 보다 누구와 마시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와인인 것 같다. 이런 와인을 매일 마시다 보니 문뜩 그 와인 산지가 궁금해 졌다. 기차를 타고 가며 스쳐 지나가본 적은 있지만 와인 산지를 직접 방문해 본적이 없다. 한국에 도착하는 와인들은 긴 여행 기간을 갖는다. 그래서 와인은 만들어진 생산지에서 그 지방 음식과 마시는 것이 정말 맛있다고 한다. 어느 날 내가 좋아하는 와인 생산지에서 맛있는 그 지역 음식과 함께 와인을 마셔보고 싶다.
제주의 돈내코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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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꿈 리스트 다섯
: 일주일에 책 한 권
TV와 스마트폰이 익숙해진 요즘 책을 점점 멀리하는 나를 보곤 한다. 원래는 하루에 책 한 권 이었는데 나의 생활 패턴을 고려하여 일주일에 책 한 권으로 바꾸었다. 길거리나 어디나 넘쳐나는 활자들 속에서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시간을 갖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짧은 인터넷 기사들만 보다 보면 책을 읽는 것이 점점 어렵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도서관 옆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였지만, 가까이에 도서관이 있어도 잘 가지 않는다. 그만큼 나의 요즘이 인터넷과 자극적인 무엇인가에 익숙해진 것 같아 씁쓸해 진다. 책을 읽는 것은 습관이라 한다. 다시금 좋은 습관을 가지고 싶다.
로마의 70년 된 커피숍의 에스프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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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생각난 원고 청탁으로 약간은 급하고, 당황스럽게 적어본 나의 버킷리스트이지만 하나하나 고민해 보니 내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이 참 많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또 리스트가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을 잊고 뜻 없이 소중한 하루를 의미 없이 보낸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버킷리스트 책을 찬찬히 읽다 보니 마지막 장에 의미 있는 구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버킷리스트, 실천하지 않으면 ‘버킷(장바구니)’에 지나지 않을 뿐.”
내가 적은 소중한 버킷리스트들도 삶 속에 행하지 않으면 그냥 一場春夢(일장춘몽)이다. 토마스 헨리 헉슬리는 “삶의 위대한 끝은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라 했다. 이제 난 내가 하나씩 고민했던 소중한 일들을 실천하는 것만 남았다.
사람들이 더 이상 꿈을 물어보지 않는 나에게 스스로 인생의 꿈을 물어본다. 그럼 나는 영원한 청춘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측 불가한 삶의 과정에서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오늘이 좀 더 즐거울 듯하다.
런던의 어느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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