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이었던가 기억도 가물거리던 결혼 10주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애들에게 바깥세상을 보여주면 견문도 넓히고, 큰 세상에 따라가기 위해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안 해도 열심히 할 것 같아 꿩 먹고 알 먹고 아닌가 생각도 들었었다. 올해에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큰애에게 추억거리를 만들어 줘야겠다라는 생각으로 갑작스레 여행계획을 잡았다. 국내 여행도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가는 편인데 20여 일을 남겨놓고 해외여행을 계획하려니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가족에게 가고 싶은 곳을 정하라고 하니 이구동성으로 유럽을 가자고 한다. 퇴근 후 3일 동안 인터넷을 뒤져서 일정과 금액이 맞는 여행상품을 정하고, 계약하니 여행까지 일주일 남짓 남았다. 짧지 않은 열흘짜리 유럽여행은 이렇게 얼렁뚱땅 계획되었다. 물론 패키지 상품이라 크게 준비할 건 없지만 그래도 아주 오랜만에 하는 해외여행이었는데 너무 준비 기간이 짧았던 것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꼼꼼한 준비는 여행의 기쁨을 배가시켜 주는 것인데… 출발하는 날 낮이 되어서야 가방을 다 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인천공항으로 고고씽!!!
여기서 해외여행 알뜰정보 하나! 공항철도 ‘운서역’은 공항에서 10여 분 거리이고 역 바로 옆에 공영주차장(24시간 운영, 하루 4천원, 10일 이용에 3만 6천원)이 있어 오히려 공항의 장기 주차장보다 훨씬 공항 이용이 편하다. 장기 여행을 준비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해외여행 일정 중 가장 설레던 장소가 어디냐고 물으니 여행을 시작하기 전 비행기를 기다리며 앉아있던 공항 출국 터미널이라나. 참으로 딱 맞는 말이다. 출발의 긴장감과 설렘이 교차하는 출국터미널의 분위기가 그때의 사진을 보면 지금도 기분 좋게 떠오른다.
밤 12시 드디어 인천공항을 떠나 긴 여정을 시작한다. 열 몇 시간의 길고 긴 비행시간 중에 환승하기 위해 경유한 도하에서의 두 시간이 뻐근해진 심신을 조금은 달래준다. 장거리 여행에 잠깐 쉬어가는 것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랜 비행 끝에 다음날 점심때에 첫 입국지인 런던에 도착했다. 공항에서의 첫인상이 좋고 생각보다 친절하다. 몇 년 전에 출장 갔던 미국에서의 상당히 위압적인 분위기와는 판이하다. 한껏 기대를 하고 버스에 올라 런던 시내로 들어갔다.
시내로 들어가며 느꼈던 생각은 산업혁명과 2차 대전을 겪으며 독일의 수많은 공습과 로켓공격에도 고색창연하게 서 있는 건축물과 거리를 보며 참 멋지고 아름답게 도시를 가꾸었다는 생각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묵고 있다는 버킹엄 궁전과 영화 007에서 테러에 의해 부서지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템즈강변에 웅장하게 서 있는 국회의사당(하나도 부서지지 않았다), 런던의 상징 타워브릿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이번 여행을 오길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사춘기가 한창인 아들도 신이나 DSLR 카메라를 열심히 눌러댄다. 첫날이라 몰랐지만 잘못 가져간 렌즈 때문에 여행 내내 후회를 했다. 무거운 짐들 때문에 고민하다가 표준 줌렌즈 대신 중간 줌 렌즈(50-150mm) 하나만 가져갔는데 줌렌즈의 화각, 초점거리 문제로 여행지의 전경사진 중 건질게 많지 않았다. 똑딱이 카메라를 가져가길 천만다행이었다.
런던에서의 첫날을 보내고 다음 날 도버해협을 관통하는 유로스타로 파리로 들어갔다. 유로스타에 대해 기대를 많이 했으나 바다 밑을 지나가니 구경할게 별로 없다. 다만 프랑스의 아름다운 시골풍경은 볼만했다.
여행객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인 파리에 입성하여 루브르박물관을 보니 규모나 소장품들이 상상을 초월했다. 소장품들 대부분은 쉽게 볼 수 있도록 가깝게 전시되어있고 모나리자만 유리벽으로 보호를 해놓았다. 어마어마한 박물관 유물들의 대부분은 식민지 약탈 등을 통해 소장하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프랑스의 자부심이라고 자랑하는 것이 안쓰럽다. 우리나라의 규장각 도서들도 이곳에 있다가 반환도 아닌 영구임대로 돌아온 것 아닌가.
세계 여러 도시하면 떠오르는 랜드마크가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건물이 파리의 에펠탑이 아닐까 싶다. 세느강의 야경과 어우러진 에펠탑은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철골만으로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에펠탑이 100년 전에 만들어질 때는 온갖 비난을 받은 건축물이라는데 지금은 세계 여행객을 불러 모으는 블랙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 역사는 지나봐야 알 수 있다. 유람선에서 본 에펠탑 야경과 에펠탑 위에서 내려다본 파리의 야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파리 대부분의 도시 건축물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200년이 안 된 것이 대부분이라서 인지 계획적으로 잘 지어진 도시의 느낌이 강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대단해 보였다.
유럽의 지붕이라는 스위스 융프라우를 거쳐 찬란했던 로마 문명과 패션의 중심, 도시마다 다양한 매력이 있는 이태리에 도착하니 여행 일정의 절반이 흘러 버렸다. 피사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피사의 사탑을 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이 기울어져 있어 무너질 것 같았는데 보강공사로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이태리의 수도 로마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 만큼 볼 것이 많다. 로마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고,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3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다. 벤허, 글래디에이터의 주 무대가 되었던 콜로세움을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5만에서 7만 명을 수용하는 이 시설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은 로마인들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도시의 인구 전체를 수용할 만큼 컸다 하고 5만 관중이 출입하는데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엘리베이터 장치도 고안되었고 천막지붕도 갖추었다니 실로 놀라웠다. 2000년 전에 상암월드컵 경기장에 버금가는 거대한 건축물을 지으며 로마는 영원하리라 생각을 하였을까?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에서는 미켈란젤로가 몸이 불구가 되면서까지 4년 만에 완성했다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직접 보는 호사도 누렸다. 바티칸은 이태리의 수많은 관광지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곳으로 갈 계획이 있다면 필히 예약을 해야 길거리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다. 또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피렌체는 르세상스의 발상지였으며 미켈란젤로, 단테, 레오나르도 다비치 등 세계적인 예술가의 고향이었다. 피렌체는 800년 된 건물을 시청사로 쓰고 있었고 개업한 지 400여 년 된 식당을 후손이 대대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이태리 지역이 비슷했다.
이태리에서 역사는 박제된 유물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었다. 물론 우리도 절이나 고궁 등 오래된 건축물이 있지만 800년 된 건물에 에어컨과 컴퓨터를 놓고 사무실로 쓴다는 건 쉽게 짐작되진 않는다. 또 여행하며 본 대영박물관, 루브르,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서 본 여러 예술품도 대부분 진품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진열해 놓았다는 것이다. 3000년의 세월을 그대로 머금은 예술품을 직접 보는 즐거움은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우리의 박물관에 가보면 대부분은 지하 수장고에 있고 모조품만을 전시해 놓고 있다. 아무리 정교하게 복사해도 세월의 무게는 재현하지 못할지니 혹시 이러한 운영방식이 역사나 박물관에 대한 호기심을 떨어뜨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피렌체를 거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들어갔다. 120여 개에 이르는 작은 인공섬, 400여 개의 다리 운하와 물길로 이어져 있고,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곤돌라는 인상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베네치아는 조그만 인공섬들 사이로 수많은 물길이 있고 현관 앞까지 배가 들어가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곤돌라를 이용해 골목 물길을 다니고 중앙을 관통하는 운하에는 수상택시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운하를 따라 관광 중 앰뷸런스 수상 택시가 지나가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지상에 자동차가 없단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물길과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의 현란한 풍경 때문이었을까? 곤돌리어가 노를 저으며 불러줬던 오 솔레미오의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오버랩되며 유럽 여행 중 가장 강렬한 추억을 갖게 한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점이 4세기경이었으며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바다에 피난처를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도심을 관통하는 대운하에서 수상택시를 타고 2014년 조지 클루니가 결혼식을 올려 유명해진 Aman Canal Grande 호텔 앞을 지나 육지로 나와 베니스 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열흘의 유럽여행을 마무리했다. 영화배우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탄 베니스 영화제가 열렸던 베니스는 베네치아의 영어식 명칭이다.
얼렁뚱땅 계획한 여행이었는데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들이 절로 미소 짓게 만든다. 4개국을 경유하는 빡빡한 여행이라 버스를 타고 상당시간을 이동해야 했지만 참 잘 다녀왔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이태리는 따로 다시 한 번 가고 싶을 만큼 좋았다. 음식과 물가도 이태리가 가장 저렴했다. 애들한테는 베네치아에 꼭 다시 오자는 또 한 번 지키지 못할 약속도 했다. 여행이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고 한다. 나를 비우고 세상에 겸손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에 애들과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기 위해 다음 여행은 지금부터 미리 계획을 세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