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창립되어 90년 전통을 계승하는 영국을 대표하는 오디오
영국을 대표하는 전통의 스피커 메이커 ‘TANNOY’
영국을 대표하고 옥스퍼드(OXFORD) 영어 사전에도 등재된 TANNOY의 본사는 현재 스코틀랜드의 coatbridge에 있지만 창업은 1926년 영국 런던의 West Norwood에서 설립되었다. TANNOY 하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오디오 팬들에게 있어서 미국의 JBL과 더불어 스피커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브랜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관된 미학과 자부심을 견지하고 고풍스럽고 편안함의 빈티지로 신격화된 존재로 되어버린 TANNOY는 자동차와 전쟁의 역사 속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피어난 영국의 스피커 브랜드 TANNOY의 역사에 대해 함께 되돌아보고자 한다.
창립자 Fountain의 청년기
Gay Rupert Fountain은 누구?
‘가이 R 파운틴’ (Gay Rupert Fountain, 이하, ‘파운틴’)은 TANNOY의 창업자이다.
그는 19세기 마지막 해인 1900년, 요크셔 지방 리즈 (Leeds) 근교에서 태어났다. 리즈는 지금은 금융경제의 핵심 도시로 발전하여, ‘북쪽의 수도’로 불리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양모 산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 도시였다.
그는 그래머 스쿨(우리의 중학교)까지 그곳에서 보냈다. 졸업 후 공군부대(영국 공군의 전신)에 입대 예정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에 끝난다. 그는 미래를 추구하면서 아무런 정처도 없이 수도 런던으로 향했다. 1920년,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랭커스터(LANCASTER) 자동차회사
우선 ‘가이 R 파운틴’은 런던 남동쪽의 West Norwood에 생활 거점을 두고 조판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 후 자동차기술에 강한 흥미를 갖고 있던 그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랭커스터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당시에 일반적인 수주방식이었던 섀시(차대)에 차체를 덮는 코치워크(Coachwork) 방식의 생산이 주류였다.
지금과 같이 프레임과 바디가 하나로 이루어진 완성차 형태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섀시 상태로 판매되고 귀족들의 요청에 외부 바디를 꾸미는 형태의 소량생산방식이 일반적이었다. Bugatti 57, Cadillac V-16, Ferrari S.p.A 250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조된 모든 Rolls-Royce의 차량은 섀시 상태로 판매되었던 시기였다.
전자기술의 관심
1920년 중반이 되면서 그는 전자기기에 관심을 끌게 된다.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적군의 공습경보를 알리기 위한 라우드스피커, 축음기, 라디오 등의 발달이 젊은 시절의 파운틴도 전자기술에 관심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많은 사람이 휴대폰과 같은 IT 기술이 접목된 제품에 관심이 있듯이, 당시에는 라디오와 같은 최신 기술을 이용하여 제공되는 엔터테인먼트에 세상이 주목하고 있었다. 또한, 이 산업을 개척하려는 많은 파이오니아들이 기를 쓰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도 당시의 흐름에 매료된 한 사람이었고, 이러한 전자산업에 크게 매료되어 갔으리라.
당시 전자기기가 직면한 문제는 진공관의 히터용 전압과 플레이트 전압을 제공하는 전원부에 있었다. 정류기이라는 것이 없이 모두 배터리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납축 배터리는 가격도 비싸고, 크고, 게다가 자주 충전해야 했다. 한편, 프랑스 발명가가 만든 Leclanché cell이라 불리는 망간 건전지도 비싸고 수명이 짧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문제는 업무용이라면 몰라도, 예를 들어 가정용 라디오에서는 해결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파운틴은 교류 전원(AC)에서 직류 전원(DC)을 얻을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TANNOY의 탄생
정류기의 완성
파운틴은 영국의 그래머 스쿨이 졸업의 전부였고 그는 천재도 이론가도 발명가도 아니었다. 단지 자기 일에 몰두하는 전문가였다. 그는 물리학이나 화학의 지식은 기초적인 것뿐이었기에 훌륭한 정류기를 고안하고 제조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의 시행착오는 당당히 가정에서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고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전해정류기를 완성했다. 이 정류기의 완성 때문에 1926년 파운틴은 그 정류기 제조를 위해 ‘Tulsemere Manufacturing Campany’를 설립하였고 그의 나이 26세가 되었던 시기였다.
Tulsemere Manufacturing Campany
파운틴은 런던의 West Norwood에 있는 Tulsemere Road에 있는 차고지 2층에 공장을 만들고 정류기 제조를 시작했다. 또한, 동시에 자기형 (励磁型) 다이내믹 스피커 개발에도 노력하기 시작한다. 이 사업은 순조롭게 확대되었고 1930년에는 스피커와 앰프 사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공장을 더 넓은 곳을 이전하게 되지만, 차고지의 형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즉, Tulsemere Manufacturing Campany는 처음의 차고지 형태에서 조금 넓은 차고지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TANNOY의 이름
1932년 3월 10일 파운틴은 회사명을 자신의 이름과 같은 ‘Gay・R・Fountain’으로 변경하고 TANNOY라는 상표를 등록한다. TANNOY는 당시의 주력 제품인 전해정류기의 금속전극 재료의 Tantalum과 아연합금인 lead alloy를 결합한 신조어였고 음향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창업자의 이름과도 무관하게 재료에서 따 온 보기 드문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황금시대
비약의 시대
1933년에 TANNOY는 2-way 스피커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스피커에는 우퍼와 트위터 각각에 레벨 콘트롤이 있고, 트위터에는 주파수 보정용의 회로를 갖는 등 그 방식은 현재의 제품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34년에는 TANNOY는 고성능, 고품질의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계하고, 동시에 10W에서 200W의 파워앰프도 만들기 시작한다. 게다가 독자의 공장을 지으면서 TANNOY는 창업된 지 10년도 되지 않는 시기에 높은 기술을 바탕으로 유럽의 오디오 업계에 리더적 존재가 된다.
차고지와의 이별
1934년, 자사 공장설립에 따라 그동안의 차고지 생산을 끝낸다. 이 해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勃発)하는 1939년의 수년간은 TANNOY에는 제1차 황금 시기였다.
이 시기의 TANNOY에 의한 고출력 고품질의 음향기기와 중계기의 완성은 당시의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음악은 더욱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하였고, 정치가와 사회적 리더의 목소리는 퍼블릭 어드레스(Public address, PA) 장치를 통해 일반의 대중에게도 전달되었다. 지금과 같은 고성능 고출력의 라인어레이 스피커가 없었던 세계대전 시절, 대중 연설을 하는 모습을 상상한다면 당시의 TANNOY 제품의 역할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한편, PA 음향의 발전은 야외 스포츠에서도 관전하는 사람에게도 스포츠를 한층 흥미롭고 친밀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역 등의 공공시설에 설치된 음향장치는 많은 사람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급속히 발전하는 산업계의 정보가 간단하고 확실하게 전달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TANNOY는 당시 이러한 정보혁명의 앞에서 활동범위를 두었고, 자사 제품과 그 생산기술의 개발에 주력했다. 이 경험과 지식의 축적이야말로 오늘날 TANNOY의 기반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발전의 시작과 JBL
젊은 시절의 파운틴은 차고지 공장과의 인연이 깊었다. 1926년 파운틴 회사는 차고지 건물의 2층 임대 방이었고, 1930년 업무 확장에 따라 이전한 곳도 1층 차고지의 이층집이었다. 자동차 생산부터 시작된 파운틴은 이러한 환경에서 TANNOY라는 회사명을 만들었다. 회사 앞 도로의 이름이 회사명의 유래가 되거나 제품 소재가 브랜드명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파운틴은 젊은 시절에는 날카로운 경영 감각도 갖고 있었다. 종종 미국의 JBL과 TANNOY가 비교되지만, JBL의 설립자 ‘제임스 B 랜싱’(James Bullough Lansing, JBL 브랜드는 설립자 이름의 약자)과 TANNOY의 창립자 ‘가이 R 파운틴’(Gay Rupert Fountain)을 비교하면 유사한 인생과 차이가 보인다. 미국과 영국, 두 사람이 살았던 국가와 위치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대략 같은 시대에 자신에게는 처음인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랜싱은 내연기관과 소리의 천재 엔지니어이었고, 아마추어 무선에도 관심을 가질 정도의 열성적이었지만, TANNOY의 파운틴은 그래머스쿨이 학력의 전부였음에도 상당한 노력가였다고 할 수 있다.
JBL의 랜싱이 JBL의 전신으로 1927년 Lansing Manufacturing Inc.라는 스피커 회사를 만들고, 1934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회사 MGM(Metro Goldwyn Mayer Studios)으로부터의 의뢰로 영화 시스템 스피커 개발로 비약적 발전을 가져온다. 소리에 대한 연구 애착과 관심, 기술력은 있었음에도 JBL의 랜싱은 경영 부진의 원인으로 인해 1941년에 회사가 ALTEC 서비스사로 인수되어 버리지만, TANNOY의 파운틴은 1940년대에는 유럽에서 오디오 업계의 리더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전쟁 전후 발전의 개요
세계대전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연합군 진영에 있었던 영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TANNOY와 JBL은 발전의 원동력의 차이점이 있다. TANNOY가 세계대전 속에서 독일군의 공습경보를 알리고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PA 스피커와 그 후 영국 왕실을 대표하는 하이파이 스피커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면, JBL은 독일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던 미국 본토의 환경과 할리우드라는 영화산업에서 스피커 시스템 개발이라는 기회에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출발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1940년 후반부터 1950년 전반에 걸쳐 TANNOY의 파운틴은 첫째로 대용량 출력의 음향장치, 둘째로 특수 산업의 통신장치와 세 번째로 고품질의 스피커라는 영역에서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물론, 파운틴은 이 세 가지의 영역에서 성과를 남겼지만, 특히나 오늘날에는 ‘고품질의 스피커’라는 항목에서 세계대전 전후의 시대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창업자의 열정과 사상이 깃들어 있고 명확한 표현을 원했던 TANNOY
1947년 Dual Concentric의 스피커 개발은 TANNOY의 대표적 제품이 되었고 그 이후에 ‘TANNOY = Dual Concentric’라고 할 정도로 대표적인 제품이 되었다.
그러나 1974년 공장 화재로 고급 음질을 표현하는 콘지 공장이 전소하여 재기불능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지만, 독일 콘지의 사용으로 HPD (High Performance Dual concentric) 시리즈를 개발하게 된다. 이쯤 회사의 ‘가이 R 파운틴’의 은퇴로 일시적이었지만 미국 JBL을 산하에 둔 Harman International Industries에 회사를 매각하게 되었지만, 그 후 영국 TANNOY 직원들의 열정적인 힘으로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전쟁과 TANNOY
2차 세계대전과 TANNOY
1939년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에 의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자국의 경제활동의 모든 것을 이 전쟁에 집중시킨다.
당시 대부분 생산공장이 군수설비로 전환되듯이 TANNOY 회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생산 설비의 모든 것이 국방 계획에 들어가게 되었고 비행장의 경보장치, 탱크와 잠수함 내에서의 긴급 경보장치, 포병대의 지휘 전달 통신기기, 군수공장 내에서 사용되는 경보장치 등을 생산하게 된다. 그러나 1945년 종전이 되면서 TANNOY는 바로 재생장치와 통신기기의 제조로 재개하게 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연구 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한편, 이 무렵부터 TANNOY의 제품 품목 중 하나는 회의장 내에서의 커뮤니케이션 회의 장비와 통역 장비가 추가된다. 실제로 전후의 국제협력 관계의 진전에 따라 TANNOY는 세계적으로 대표적 회의설비를 많이 다루고 있었다. 국제연합의 임시 본부가 된 파리의 회의장, 제네바의 국제연맹의 컨벤션 센터, 뉴욕의 유엔본부 빌딩 등이 설치 사례의 일례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회의설비에 큰 발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후 TANNOY는 국제회의에서 통역 장비, 음향 장비의 공급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업체로 활약하게 되었고, 중요한 국제회의장에 TANNOY의 장치를 설치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고 불릴 정도였다.
TANNOY의 대명사 ‘Dual Concentric driver’의 탄생
TANNOY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군의 PA 시스템과 통신 장비의 우수성에 의해 그 이름을 더 높였지만,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947년에 그 이름을 더욱 알릴 기회가 되었다. 로널드 H · 락캄들과 함께 지금도 기본 구조가 변하지 않는 장치인 ‘듀얼 콘센트릭 (통칭 ‘모니터 블랙’)’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 알텍사가 개발한 동축 2-way 604에서 힌트를 얻어, 자사 마이크 개발의 교정용 원으로 시험 제작된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고역은 콤프레션 드라이버에 의한 혼형이며, 저역은 콘형 다이렉트 라디에이터로 이 두 가지를 동축상에 일체화시키면서 싱글 마그넷에 두 개의 간격을 새긴 독특한 디자인이었다. 이렇게 TANNOY의 대명사가 된 ‘듀얼 콘센트릭’은 탄생하게 되었고 그 구조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TANNOY의 제2의 황금시대
Autograph의 탄생
세계대전 후 각 나라에서의 전쟁복구 정책과 함께 1948년 전후 LP 레코드 음반 발매가 되고, 세계의 오디오 메이커에서 새롭고 호화스러운 가정용 스피커 시스템의 발표가 이어졌다.
또한, 전쟁 속에서 레이더 기술과 무선통신의 기술발전은 1950년대에 FM 방송이라는 새로운 라디오 방송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가정에서의 하이 퀄리티 음악재생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TANNOY도 모니터 블랙 발표 직후 ‘듀얼 콘센트릭 스피커 시스템’이라는 베이스 리플렉스 코너형 시스템을 만든다.
하지만 1953년에 발표된 후 평가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VITAVOX의 ‘CN191’과 Electro-Voice의 ‘The Patrician’ 등에 경합할 수 있는 제품으로 기획된 것이 오디오 사상 최고의 명기 ‘오토 그래프(Autograph)’이다. 창업자 Gay Rupert Fountain 자신의 자필 사인을 새기고, 그 이름을 모델명으로 한 것이 그 이름의 유래이다.
제2차 황금시대
1953년 TANNOY는 오토 그래프를 발표하면서 그 후에 명기로 불리는 신제품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쯤부터 TANNOY 하이파이용 스피커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1954년에는 ‘York’, ‘Lansdowne’을, 1955년에는 창업자의 이니셜인 ‘GRF’를 발표한다. 이때부터 TANNOY는 본격적으로 북미시장에 진출하고 1953년에 하이파이 스피커 판매와 PA 시스템 및 서비스를 업무활동으로 하는 ‘TANNOY CANADA’를 설립하게 된다.
1954년에는 하이파이 스피커의 판매와 미국시장에 ‘TANNOY AMERICA’를 설립한다. 특히, TANNOY AMERICA는 영국의 소품종 제품 구성과는 달리, 미국 시장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모델이 풍부하게 라인업이 되어 있었다.
Neo TANNOY
운명의 1974년
오토 그래프를 필두로 한 상업적 성공에 이어 각 부분의 TANNOY는 순조롭게 경영을 이관시킨다. 그러나 1974년 뜻하지 않게 급변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콘어셈블리 공장의 화재였다. 때문에 자사에서 만들었던 유닛 인클로우저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고, 거의 같은 시기에 Gay Rupert Fountain이 은퇴를 결심한다.
1926년 회사를 창립한 이래, 48년간에 거쳐 TANNOY사를 이끌어 온 파운틴도 이때가 74세의 나이였고 두 번에 걸친 심장발작으로 그의 몸도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이러한 일로 인해 파운틴은 TANNOY 사의 미래 발전을 고려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이미 4항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것은 당시 모든 음향 분야에서 세계적인 규모로 활동하고 있었던 ‘하만 인터내셔널사’에 TANNOY 매각이었다.
Fountain의 사별
1974년 TANNOY는 JBL 등을 산하에 둔 ‘하만 인터내셔널’의 일원이 되었고, 알파벳 시리즈인 ‘Arden’, ‘Berkeley’, ‘Cheviot’, ‘Devon’, ‘Eaton’ 등을 발표한다.
한편, 하만 인터내셔널의 사장 하만은 TANNOY와의 협의 시, TANNOY 전 사원의 고용과 함께 제품 콘셉트는 변경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게다가 향후 기술 혁신에 TANNOY가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자본이 투입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연구개발부서와 관리부서의 두 공장이 지어지고, 1977년에 ‘Buckingham’과 ‘Windsor’를, 1978년에는 ‘Mayfair’에서 ‘Oxford’까지 TANNOY를 계승한 새로운 라인업을 발표한다. 그러나 제품의 양산화 (즉,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가 시대의 경향이라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의 TANNOY 직원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불만이 되고 있었다.
JBL의 랜싱이 그이 나이 47세가 되던 1949년에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과는 달리, TANNOY의 설립자 Gay Rupert Fountain은 가벼운 병에 걸린 후, 1977년 12월 10일 영면에 들어간다. 그의 나이 77세였다.
새로운 영국 TANNOY의 탄생
파운틴의 장례를 치르면서 50년 가까이 TANNOY와 함께한 직원을 시작으로 젊은 사원까지 Gay Rupert Fountain의 사상을 계승한 제품 만들기를 실현하고, 1981년에 ‘GRF MEMORY’, 1982년에 런던 전통의 지명을 딴 ‘Westminster’와 ‘Edinburgh’를, 1983년에는 ‘Stirling’과 10” 12” 15”의 듀얼 콘센트릭을 이용한 제품을 연이어 발표하게 된다. 게다가 1996년에는 TANNOY 70년의 기술과 전통을 결집한 4-way의 ‘Kingdom’을 발표하고, 1990년대에 프로 음향 스피커도 이쯤을 시작으로 듀얼 콘센트릭을 채용한 다양한 제품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TANNOY의 새로운 도약
TANNOY는 2002년 덴마크의 TC 그룹 산하의 브랜드로 들어가게 되면서 TC 그룹에서 본격적인 프로페셔널 제품은 개발이 이루어지고, 현재의 라인업 제품들이 전성기를 맞게 된다. 특히, 2014년도 발표된 최신의 차세대 Dual Concentric 기술이 접목된 CMS 시리즈 스피커의 판매는 본격적인 TANNOY 프로페셔널 스피커가 열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세계적으로 음향 제조사의 병합이 이루어지면서 TANNOY는 2015년 다시 세계적 음향기기 그룹인 ‘MUSIC 그룹’의 일원이 된다. TANNOY는 ‘MUSIC 그룹’의 적극적인 투자와 제품 개발에 힘입어 순조로운 경영과 함께 영국 명문의 브랜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창립자 ‘가이 R 파운틴’에 의한 TANNOY의 탄생은 단순히 파운틴의 개인적 흥미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상업적 목적에 쉽게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혹은 쓰고 버리는 제품이 흔한 요즘이지만, 목제 제품들은 아직도 스코틀랜드 현지에서 생산하고 있는 TANNOY의 하이파이와 프로 제품에는 명확한 표현을 원했던 창업자의 열정과 사상이 깃들어있다. TANNOY의 일괄된 철학과 역사, 전통을 계승하면서 진화를 이어가는 TANNOYISM이야말로 지금도 건재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참고 www.music-group.com/brand/Tannoy/ourstory?active=Our%20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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