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AI 전환의 다음 단계

지상파 AI 전환의 다음 단계

방송 현장에서 AI는 더 이상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AI를 쓰고 있는가’와 ‘AI를 쓸 준비가 되었는가’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크게 나타난다. 캐나다 스트리밍 기술기업 하이비전(Haivision)이 전 세계 방송 전문가 1,300명 이상을 조사한 ‘2026 방송 전환 보고서(2026 Broadcast Transformation Report)’에 따르면, 방송사의 AI 사용률은 2025년 25%에서 2026년 27%로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반면 응답자의 64%는 향후 5년간 방송 제작에 가장 큰 영향을 줄 기술로 AI를 지목했다. 이러한 괴리 현상은 뉴스캐스트스튜디오(NewscastStudio)의 연례 산업 심리 조사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응답자의 94% 이상이 2026년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줄 기술로 AI를 꼽았지만, 자사가 AI 기반 워크플로우를 전면 도입할 ‘완전한 준비’가 됐다고 답한 비율은 14.6%에 불과했다. 또 지난 8월 스트리밍 경영진을 대상으로 한 후속 조사에서도 그 수치는 17%에 머물렀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실제 AI 도입의 무게중심이다. 뉴스캐스트스튜디오는 방송사의 AI 적용이 주목받기 쉬운 ‘콘텐츠 생성’보다 메타데이터 관리, 워크플로우 조정, 콘텐츠 분석 등에 집중되어 있다고 진단한다. 제작, 후반작업, 유통, 아카이브 시스템 전반에서 자산을 추적하고 각 단계의 작업 프로세스를 수동 개입 없이 자동으로 촉발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결국 AI의 성패는 ‘무엇을 새롭게 생성하는가’가 아니라, ‘일상적 업무 프로세스 속에서 얼마나 끊김 없이 안착시키는가’에 달린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원고에서는 2026년 하반기 국내 지상파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1~2년의 AI 활용이 개별 프로그램 단위의 파격적 실험이었다면, 올해 하반기의 움직임은 조직과 데이터, 표준과 거버넌스를 먼저 세우는 ‘인프라 구축’의 성격을 띤다. 그 전환이 어디까지 왔고, 무엇이 아직 부족한지 살펴본다.

 

시연에서 조직으로
가장 뚜렷한 변화의 사례는 KBS다. KBS는 2026년 7월 1일 저널리즘 지원용 사내 AI 포털 ‘카이로스’를 가동한 데 이어, 8월 3일에는 기획부터 후반작업까지를 아우르는 사내 전담 조직 ‘AI 프로덕션(AI Production)’을 신설했다. 온라인에서는 카이로스가 AI 서비스와 실무 활용을 뒷받침하고, 오프라인에서는 AI 프로덕션이 영상 제작과 기술 지원을 맡는 이원 구조다. 이어 8월 10일 <뉴스12>에서는 AI 음성 합성(TTS) 기반 리포트가 시범 송출되었는데, 여기에 쓰인 합성 음성은 아나운서 10여 명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녹음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되었다. 현재 AI 프로덕션의 활용 범위는 리서치와 대본 보조, 영상 아카이브 검색, 자막 생성, 더빙, VFX까지 폭넓게 걸쳐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순서’다. 개별 프로그램 단위의 화려한 시연을 앞세우는 대신, 상시 운용 조직과 사내 플랫폼을 먼저 구축한 뒤 콘텐츠를 얹는 방식을 택했다. 그 토대 위에 오는 11월 방영 예정인 28부작 대하드라마 <문무>(제작비 약 300억 원)가 놓인다. 대규모 전쟁 장면의 군중 묘사, 화재 시퀀스, 그리고 위험도가 높아 실제 촬영이 어려운 장면의 사전 시각화 및 대체 제작을 AI가 맡게 된다.

SBS와 MBC의 행보도 방향을 같이한다. SBS는 2026년 경영 기조를 ‘AI와 함께하는 콘텐츠 리더’로 선언하고, AI 퍼스트 전략과 콘텐츠 경쟁력 강화를 두 축으로 제시했다. 특히 AI 기반 기획·제작 확대뿐만 아니라 영상 데이터의 자산화 및 디지털화, 방송콘텐츠 특화 멀티모달 AI 에이전트 구축을 핵심 과제로 꼽았으며, 저작권과 데이터 관리까지 AI 전환의 범위에 포괄한 점이 눈에 띈다. 그 성과물로 드라마 <김부장>은 2회 오프닝의 약 3분 분량 액션 시퀀스를 실제 촬영 없이 AI로 구현해, 통상 제작비의 약 10분의 1 수준으로 비용을 대폭 낮추었다.

MBC 역시 제작진이 숏폼 클립 제작에 AI 도구를 직접 활용하는 방식을 확대하는 한편, 2027년 초 전사 AI 에이전트 도입을 준비 중이다. MBC 경영진은 AI 도입의 효용을 ‘워크플로우 단순화와 외주 업무의 내부화를 통한 비용 절감’으로 명확히 요약한다. 나아가 9월 14일 선임된 이성주 제37대 사장은 심화하는 방송 산업의 위기 속에서 AI 전환 대응 능력을 최우선 역량으로 내세워 선출되었으며, 주요 공약으로 AI 드라마 편성, 개인 AI 창작자에 대한 문호 개방, 그리고 ‘AI 조직 통합’을 공언한 바 있다.

표 1. 지상파 3사의 AI 전환 추진 현황
표 1. 지상파 3사의 AI 전환 추진 현황


이러한 지상파의 동시다발적 전환은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압박의 산물에 가깝다. 지상파 광고 매출은 2011년 1조 1,000억 원에서 2016년 7,930억 원으로 줄어든 데 이어, 2026년 상반기에는 3,104억 원까지 급감했다. 반면 같은 기간 드라마 미니시리즈 제작비는 10년 전 회당 6억~8억 원에서 현재 최대 15억 원까지 치솟았다. KBS의 경우 2025년 당기순손실 818억 원을 기록하며 4년 연속 적자의 늪에 빠졌다.

외부 진단 역시 비관적이다. 미디어파트너스아시아(MPA)의 ‘아시아태평양 광고 트렌드 2026’은 141억 달러 규모의 한국 광고시장에서 리니어 TV가 2026년 한 해에만 10.4% 감소할 것으로 내다보며, 이를 ‘구조적 붕괴(structural collapse)’로 규정했다. 연평균 2.1% 감소에 그쳐 ‘관리된 침식’ 양상을 보이는 일본 시장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분석이다. 매출은 곤두박질치고 제작 단가는 치솟는 국면에서 방송사의 제작 역량을 지키기란 요원하다. 결국 공정 자체의 원가 구조를 뿌리부터 흔들어야 하는 절박함이, AI를 일회성 실험의 대상이 아닌 ‘상시 인프라’의 반열로 끌어올린 진짜 배경이다.

 

3가지 인프라: 데이터, R&D, 인재
방송사 내부의 자구책과 나란히, 정부는 개별 방송사가 혼자 감당하기 버거운 구조적 층위를 메우고 있다. 그 축은 크게 데이터, 연구개발(R&D), 그리고 인재라는 세 가지 인프라로 구성된다.

첫째는 데이터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와 한국전파진흥협회는 지난 2026년 8월 5일, 방송영상 AI 학습용 데이터 117만여 건을 교육·연구용으로 전격 개방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의 ‘인공지능 허브 안심 구역’을 통해 사전 승인 절차를 거치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이미지 캡셔닝(29만 4,906건)과 비디오 캡셔닝(21만 7,587건)을 중심으로, 한국형 배경·객체 생성 및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인물 생성 등 총 10개 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동안 지식재산권, 초상권, 인접권 등의 장벽에 막혀 접근조차 어려웠던 방송영상을 정부가 직접 공공 자원화함으로써, 국산 영상 생성 모델의 고질적인 데이터 병목 현상을 대폭 낮춘 모범적인 선례라 할 수 있다(박수형, 2026). 이어 9월 18일 방미통위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실무협의회에서는 이 데이터들을 AI 허브로 상시 제공하는 연계 방안까지 확정되었다.

둘째는 연구개발(R&D)이다.
방미통위는 올해부터 2030년까지 총 727억 원을 투입하는 대규모 ‘디지털미디어 혁신기술개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지난 9월 17일에는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과 함께 ‘방송미디어 인공지능 개발자 간담회’를 개최하고, 김종철 위원장을 비롯해 KBS·SBS·MBC충북 등 방송사, ETRI·KIST 등 주요 연구기관 관계자 20여 명이 참석해 현장 과제를 점검했다. 이날 논의된 핵심 기술은 크게 두 축으로, ‘비전문가가 AI와 대화하며 영상을 검색·생성·편집하는 기술’과 ‘시청 이력 및 콘텐츠 맥락을 분석해 초개인화 콘텐츠를 추천·생성하는 기술’이다. 전문가들은 현장 적용과 조기 사업화를 위해 고성능 데이터·컴퓨팅 자원 확보는 물론, 방송사와 플랫폼 현장을 거점으로 한 실증사업이 필수적이라는 제언을 내놓았다. 이는 방송사가 단순히 기술의 ‘수요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개발 단계부터 ‘실증 파트너’로 결합해야 함을 시사한다.

셋째는 인재와 지역의 균형이다.
방미통위와 한국전파진흥협회는 7월 31일 ‘2026년 지역방송 인공지능 제작 실증 지원’ 사업 대상으로 전주MBC, KBS춘천, TJB대전방송 등 8개사 8개 프로그램을 선정했다. 예산과 기술력, 제작 인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 지상파와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를 타깃으로, AI 제작 교육을 실제 프로그램의 기획·촬영·편집 공정과 직결시킨다는 취지다. 정부는 2025년부터 2026년에 걸쳐 7개 권역에서 관련 교육을 이어왔다. 특히 9월 10일 열린 ‘2026 방송미디어 인공지능 혁신인재 양성 세미나’에서는 AI 자막·화면해설, 음성 기반 라디오 뉴스 제작, 후반작업 자동화 등의 구체적 현업 적용 사례가 공유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일회성 시연에 그치던 과거의 실험들과 달리, 교육을 실제 방송 편성물 생산과 직접 묶어내는 방식이 안착하고 있다.

이 같은 인프라 구축은 글로벌 미디어 시장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현재 전 세계 미디어 시장은 단순한 ‘신규 콘텐츠 제작’에서 ‘보유 자산의 재활용’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아마존 프라임비디오(Prime Video)는 배우의 입 모양을 더빙 음성에 자연스럽게 맞추는 AI 립싱크 더빙 기술을 활용해, 독일 드라마 <맥스턴 홀>의 영어 더빙 버전을 전 세계에 성공적으로 선보였다. 독일 RTL 계열의 콘스탄틴 엔터테인먼트는 법정 프로그램의 기존 방영 회차를 이미지 편집, 음성 합성, 립싱크 보정 기술로 새롭게 가공하여, 등장인물과 최종 판결이 바뀐 전혀 다른 5개의 신규 에피소드를 제작해 냈다. 제임스 캐머런(James Cameron) 감독이 이끄는 라이트스톰 비전은 지난 9월 16일 AI 3D 기업 ‘아웃사이더스(Outsiders)’ 인수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 주된 목적 중 하나는 방송사가 보유한 전통적 라이브러리를 ‘전통적 컨버전 방식보다 훨씬 짧은 시간과 낮은 비용으로’ 3D 입체 콘텐츠로 전환하는 데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방송사가 쌓아두기만 했던 거대한 아카이브는 더 이상 비용 유발 요인이 아니다. 이제 AI를 통해 고부가가치 자산으로 부활하는 새로운 경로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지상파 AI 인프라의 전략적 방향성
지금까지 살펴본 일련의 흐름은 방송사 기술·제작 조직에 세 가지 전략적 과제를 남긴다.

첫째, 아카이브를 기계가 판독할 수 있는 자산으로 구축하는 일이다. SBS가 즉시 과제로 꼽은 ‘영상 데이터의 자산화’와 정부가 전격 개방한 117만 건의 학습 데이터는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장면, 인물, 주제가 정교하게 태깅된 구조화 데이터와 일관된 메타데이터 스키마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AI 도구도 사내 자산에 접근할 수 없다. AI 도입의 무게중심이 ‘콘텐츠 생성’이 아닌 ‘메타데이터와 워크플로우 조정’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AI 활용의 표시·추적 기능을 제작 파이프라인에 내장하고 법적·윤리적 거버넌스를 확립하는 일이다. 2026년 시행된 ‘AI 기본법’과 EU의 투명성 규정은 AI 생성 사실의 고지와 기계 판독 표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자막 한 줄을 덧붙이는 형식주의를 넘어, 촬영부터 송출까지 AI 활용 조건과 검증 이력이 자동으로 기록되는 ‘추적 가능성’과 ‘설명 가능성’을 파이프라인 자체에 내재화해야 한다. 아울러 해외 성우들이 넷플릭스를 상대로 제소한 학습권 소송이 시사하듯, 사내 구성원의 음성·초상권 활용이나 외주 계약의 AI 학습 조항, 보도물 승인 절차를 명문화하는 거버넌스 구축이 시급하다. 결국 2026년 하반기 지상파가 이뤄낸 진짜 성취는 몇 편의 화려한 AI 콘텐츠가 아니다. 그것은 AI를 상시로 가동할 수 있는 ‘인프라의 구축’이며, 그 인프라의 내실이 앞으로 미디어 시장의 생존 격차를 갈라놓을 것이다.

셋째, 정부 R&D와 지역방송 실증 성과를 표준화하고, 제작·유통·수익 모델 전반의 구조적 혁신을 도모하는 일이다. 총 727억 원 규모의 정부 R&D와 지역방송 실증사업이 산업의 역량으로 축적되려면, 실증 결과와 워크플로우를 상호 공유할 수 있는 표준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전사적 AI 전환은 초기 도입 비용과 지속적인 인프라 유지비를 동반하므로, 기술만으로 위기를 돌파하기보다 제작·유통·수익 모델 전반의 구조적 변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들의 본질은 최근 열린 ‘2026 글로벌 콘텐츠 컨퍼런스’에서 나온 현장 전문가들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강윤기 한국PD연합회 회장은 워크플로우의 전면적 재설계와 레거시 미디어의 혁신을 주문했고, 엄선원 오픈AI 한국 커뮤니케이션 총괄은 레거시 미디어가 쌓아온 아카이브와 현장 관계라는 대체 불가능한 자산의 가치를 역설했다. 특히 최동은 KBS 후반제작기술국 팀장은 “AI 도구는 매달 바뀌지만,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그대로다.”라며 현 현장의 단면을 진단했다. 이는 도구의 진화가 조직의 학습 역량을 앞지르는 대전환기일수록, 진정한 경쟁력은 최신 AI 모델을 선점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어떤 도구가 등장하든 즉각 교체해 활용할 수 있는 견고한 기반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금 전사적 AI 도입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답한 14.6%의 기업들이 가진 공통점 역시 값비싼 도구의 선구매가 아니라, 바로 데이터와 표준, 그리고 거버넌스의 설계다. 2026년 하반기, 지상파 방송사가 이뤄낸 진정한 성취는 AI로 만들어낸 몇 편의 콘텐츠가 아니라 AI를 쉼 없이 매끄럽게 돌릴 수 있는 ‘상시적 인프라’의 구축이며, 그 인프라의 내실이 앞으로 미디어 시장의 생존 격차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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