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베를린, 뮌헨, 빈, 런던, 파리, 뉴욕 같은 대도시는 꿈의 도시다. 거의 매일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공연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개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이 도시들의 공연장은 문을 닫거나 관광객을 위한 소수의 프로그램만을 운영한다. 클래식 음악은 더운 여름이 되면 대도시를 떠나 전원 가까이의 소도시로 자리를 옮겨간다. 인구 몇만 명 되지 않는 작은 도시들도 페스티벌이 시작되면 관광객들로 넘실댄다. 아름다운 자연과 오래된 역사를 벗하면서 느긋하게 듣는 음악은 번잡한 대도시 한복판에서 퇴근길을 재촉하여 듣는 것과는 또 다른 기쁨과 안식을 준다. 중간 쉬는 시간에 샴페인 한 잔을 동행한 사람과 마시는 것도 재미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방문해 보면 좋을 음악 여름 페스티벌을 소개한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클래식 음악에 관한 한 최고의 페스티벌은 요지부동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다. 오스트리아 서쪽에 위치한 이 작은 도시는 모차르트가 태어난 곳이자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카라얀의 출생지, 그리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 된 도시이다. 평소에도 이들에 힘입어 관광객들이 붐비긴 하지만 여름 두 달 동안 열리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시기만큼 도시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로 넘실댈 수는 없다. 축제극장(Festspielhaus)이라는 큼지막한 극장과 그보다 작은 몇 개의 극장에서는 클래식 음악 콘서트와 오페라, 연극에 이르는 다양한 공연들이 펼쳐지는데 빈 필하모닉이라는 세계 최고의 악단이 고정 출연하며, 구미 최고의 악단과 음악가들이 총출동한다. 잘츠부르크는 푸니쿨라를 타고 호헨잘츠부르크 성에 오르면 석회질이 섞여서 탁한 청록색의 강이 관통하는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아름답고 영화에 나온 미라벨 정원 등도 놓칠 수 없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집이 있는 거리엔 관광객들이 파도처럼 쓸려 다니지만 그 인파에도 불구하고 짜증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건 멋진 날씨와 들뜬 분위기 때문이다.
올해 페스티벌에서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리카르도 무티, 다니엘 바렌보임 등이 빈 필하모닉을 지휘, 브루크너, 말러, 브람스 등을 연주하고, 베를린 필, 보스턴 심포니,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등도 객원 악단으로 참가한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그리고리 소콜로프, 요요 마 등이 독주회를 펼치고, 바르톨리의 <노르마>, 네트렙코의 <일 트로바토레>, 가란차의 <베르테르> 등 화려한 캐스팅의 오페라 티켓을 구하려면 부지런히 서두르거나 극장 앞에 ‘티켓 구함’이라는 종이를 들고 서 있어야 할 것이다.
루체른 페스티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부흥시킨 것이 카라얀이었다면, 루체른 페스티벌의 중흥은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이끌었다. 지난해 초 세상을 떠난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 자리에서 내려와 암과 싸운 흔적을 얼굴에 품은 채 2003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맡았다. 페스티벌이 여름 한 철에 집중되기 때문에 상설 악단이 아니라 임시 악단인데, 아바도와 함께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최고의 음악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슈퍼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아바도가 10여 년간 여름마다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지휘한 말러 교향곡 등은 음반과 디비디로도 만나볼 수 있는데 애호가라면 놓칠 수 없는 필수 소장반이다. 아바도 타계 이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30대 후반의 라트비아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가 이끌고 있다. 물론 다른 명문 악단과 음악가들도 아름다운 호숫가에 위치한 이 도시를 찾는다. 공연이 밤에 열리니 낮에는 배를 타고 호숫가 주변 마을을 둘러보고 백조와 벗하거나 리기 산 등에 올라 알프스의 소년・소녀가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어느 페스티벌과도 맞바꿀 수 없는 루체른 페스티벌만의 장점이다.
아바도의 자리를 채우긴 어렵지만 여전히 라인업은 화려하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만날 수 있는 명문 오케스트라나 음악가들 대부분을 볼 수 있으며 오케스트라 공연만 30회가 넘게 열린다. 이런 대형 공연이 아니더라도 놓치기 아까운 공연들도 많다. 가령 루카스 교회에서 열리는 이자벨 파우스트의 실내악 공연 같은 것이 그렇다. 물가가 비싼 스위스라는 게 유일한 흠이지만 누려볼 만한 호사다.
에든버러 페스티벌
엘가와 브리튼 정도를 제외하면 별로 기억에 남는 작곡가가 없음에도 영국은 클래식 음악의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클래식 음악회를 보려면 여름철에도 시원한 에든버러로 가는 게 좋다. 탁 트인 언덕에 올라서 상쾌한 바람을 맞거나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을 둘러보고 공연장을 방문해 보자. 에든버러 페스티벌이라고 하면 우리에겐 밀리터리 타투나 프린지 페스티벌이 더 친숙하지만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은 좀 더 정통적인 장르를 다루고, 클래식 음악은 중요한 축을 차지한다.
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가 총출동하는데 올해에는 존 엘리엇 가디너가 이끄는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 안네 소피 무터의 비발디 사계, 랑랑의 리사이틀, 부흐빈더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 등이 눈에 띈다. 사실 영국은 물가가 비싸기로 소문난 나라이지만 클래식 음악회만큼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싼 편이다. 지난해에 필자는 에든버러 어셔홀의 무대 뒤편 합창석에 앉아서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하는 로열 콘세르트헤바우의 연주를 들었는데 티켓값은 2만 원 정도에 불과했고 공연은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그라페네크 페스티벌
빈(비엔나)은 여름에도 한가할 틈 없는 대표적인 관광지이지만, 역시 클래식 음악회는 뜸해지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모차르트만 줄기차게 연주하는 악단들이 성업하게 된다. 진짜 음악회는 빈에서 자동차로 40분쯤 걸리는 그라페네크 성이라는 곳에서 열린다. 이들은 야외에 무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정교하게 음향장치를 설치해 놓아서 어지간한 공연장에서 듣는 것만큼 좋은 음향을 자랑한다. (부자나라답게 이들은 비가 올 경우에 대비해서 그 뒤편에 실내 공연장도 만들어 두었다.) 그라페네크 페스티벌의 특징은 역시 야외음악회라는 것으로 해가 저물 즈음 음악회가 시작되어 음악이 절정에 오를 때면 하늘에선 별들이 보이고 새소리가 음악에 더해진다. (물론 저 멀리 과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그것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자동차로 가는 게 가장 편하지만, 무지크페라인 앞에서 전용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고, 근처 기차역에 내려서 걷거나 택시를 타도된다.
연주 횟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보스턴 심포니, 이스라엘 필하모닉 등이 출연하며, 이곳의 터줏대감인 톤 퀸스틀러 오케스트라와 요즘 잘 나가는 안드레스 오로즈쿠 에스트라다라는 콜롬비아 출신의 지휘자가 개막 공연을 맡았다.
BBC Proms
이렇게 교외나 외곽도시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페스티벌도 있다. 바로 런던의 비비씨 프롬스다. 로열 앨버트홀이라는 하이드파크 건너편의 공연장은 평상시에는 특별한 대형 이벤트성 공연이 아니면 클래식 음악 공연을 개최하지 않지만 여름만큼은 철저하게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으로 바뀐다. 음향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곳의 매력은 이른바 ‘프로밍’에 있다. 무대가 있는 중앙 플로어와 꼭대기 층의 발코니는 의자가 따로 없는 입석 공간인데 5파운드를 현금으로 내고 입장해서 보는 것이다.(공연 전에 미리 줄을 서야 한다.) 인기 공연이면 다소 빽빽하게 사람이 차는 것도 사실이지만 앉거나 심지어 누워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고, 특히 발코니 석이 1층보다 울림이 괜찮아서 이곳에서 자리를 펴고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 (그 밖의 객석은 정식으로 티켓을 판매하며 가격도 ‘정상적’이고, 음향도 물론 5파운드짜리 입석보다 낫다.)
BBC가 주최하기 때문에 BBC 산하의 다섯 개 교향악단이 총출동하며 그밖에 영국의 악단과 빈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등 해외 악단도 출연한다. 올해에는 과감하게 바흐의 독주곡들을 대형 공연장에 올리는 기획을 했는데, 요요 마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언드라시 시프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알리나 이브라기모바의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등이다. 음향이야 좀 안 좋더라도 단돈 5파운드에 요요 마가 연주하는 바흐를 2시간 동안 들을 수 있다면 일찍부터 줄을 서야 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좀 작은 캐도건 홀도 부공연장쯤으로 기능을 한다. 마지막 날에는 하이드파크 등 주요 도시 야외에서 성대한 공연도 펼쳐진다. 클래식 음악을 중심으로 8월에 열리는 유명 페스티벌 몇 개만 소개했는데 오페라 페스티벌 역시 무척 많다. 사실 유럽은 여름이면 어느 곳에서나 이런 축제를 만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하지 않은 작은 도시에 가더라도 포스터나 리플렛을 유심히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흥미로운 이벤트가 있을 것이다. 예약을 미리 하고 찾아가는 흥분과 기대감도 좋지만, 예상 밖에 만나는 공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달의 공연
이상 엔더스-김선욱 듀오 콘서트
8. 29 & 30 서울 예술의전당 IBK 체임버홀
1988년생 동갑내기 두 젊은이의 만남이다. 김선욱은 리즈 콩쿠르 최연소 우승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자리 잡았다. 영국에 거주하면서 유럽에서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다. 한국인 어머니를 둔 이상 엔더스는 독일에서 태어난 청년이다. 그의 이름은 독일에서 활동한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이름에 걸맞게 약관의 나이에 독일의 명문 악단인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첼로 수석을 맡은 바 있는 대단한 음악가다.
나중에 만났지만 절친한 친구가 된 둘이 두 악기를 위한 필수 레퍼토리인 베토벤의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다섯 곡과 세 곡의 변주곡을 이틀에 걸쳐 무대에 올린다. 다섯 곡 중 3번과 5번은 필청의 레퍼토리이고, 헨델의 유다스 마카베우스 변주곡이나 모차르트 마술피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도 실제로 자주 들을 일이 없어서 아쉬울 뿐 멋지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음악들이다. 묵직하고 구축적인 김선욱의 피아노 위에 섬세하고 감각적인 이상 엔더스의 첼로가 얹히는 것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 올해의 베스트 공연 중 하나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부다페스트의 야경
부다페스트는 런던, 파리, 베를린, 비엔나 등 유럽의 대표적인 도시들보다 규모도 작고 경제적으로도 뒤떨어지는 도시이다. 하지만 동유럽(또는 중부유럽)의 보석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이고 여기엔 다뉴브 강(헝가리어로는 두너강)을 가운데 두고 양편으로 조성된 도시의 야경이 중심에 있다. 부다 쪽에 있는 부다 왕궁의 마차시 성당과 국립 미술관, 겔레르트 언덕과 자유의 여신상, 페스트 쪽에 있는 국회의사당, 그리고 세체니 다리 등을 거의 비슷한 노란색 톤으로 조명을 밝혀 멋진 분위기를 자아낸다. 부다 쪽을 감상하는 가장 편한 방법은 페스트 쪽 세체니 다리와 엘리자벳 다리 사이 강변에 늘어서 있는 호텔 바에서 맥주를 한 잔 하면서 보는 것이다. 부다 왕궁 쪽으로 클라크 아담 광장에서 올라가면 세체니 다리를 잘 감상할 수 있고, 엘리자벳 다리도 좋은 포인트이다. 국회의사당의 야경을 보려면 그 맞은 편이나 어부의 요새에서 볼 수도 있다. 시내 전체를 보려면 겔레르트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여름철엔 밤 9시가 다 되어야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