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항용 EBS 제작기술부
누구나 음악을 좋아하기까지 어떤 계기가 있을 것입니다. 친구의 이어폰을 통해 듣던 노래 덕분에 트로트를 듣는 사람도, 우연히 본 연주자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인디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개인의 성격만큼이나 다양한 음악취향이 있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면서 감동에 휩싸이는 경험 역시 제각각이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음악의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은 바로 직접 체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듣는 즐거움과 음악을 만들어가는 즐거움은 또 사뭇 다르거든요. 지금은 잠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지만 저는 합창을 통해 음악을 만들어 가던 감동과 희열을 독자 여러분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공연을 하고 싶었습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합창단의 단원모집 포스터는 내 안의 숨은 끼를 발산하고 싶은 욕망을 이끌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항상 관객의 입장에서 공연을 바라봐 왔었는데 무대 위에서 이목의 집중을 받고 주인공이 되는 일이라니! 수줍음이 많은 제게는 설레면서도 두렵고 가슴이 두근두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포스터 아래에 적혀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거는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곧 오디션 일정이 잡혔습니다. 그렇게 필자는 합창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혹시 제창, 중창, 합창이란 단어들에서 혼란을 겪은 경험은 없으셨나요? 여러 사람이 하나의 성부를 맞추어 부르는 것이 제창, 다성악곡의 각 성부를 한 사람씩 맡아서 부르는 것을 중창이라고 합니다. 반면 다성악곡의 각 성부를 두 사람 이상이 맡아서 부를 때 우리는 합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공연장에서 흔히 접하는 가장 표준적인 형태의 합창단은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의 혼성 4부합창입니다. 그래서 합창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합창의 문을 두드릴 때 가장 먼저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음역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소리 낼 수 있는 음역의 한계를 알아보고 노래를 편안하게 불러 개인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필자도 오디션에서 음역대를 알아보고 그때로부터 계속 테너의 성부를 노래했습니다.
첫 리허설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신입단원으로 인사를 하고 필자가 속한 성부의 다른 단원들 속에 앉아 한 것은 스트레칭이었습니다. 스트레칭을 통해 목과 주변 근육을 풀어주고 노래를 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합창단마다 다른 스타일이 있겠지만 제가 만난 첫 합창단은 정글과도 같습니다. 평상시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있나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에서 저음과 고음의 소리가 롤러코스터처럼 현란하게 들려오고 타잔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 베이스파트에서 울립니다. 노래할 수 있는 준비된 몸, 자세, 정신, 즐거움을 담아 유쾌하게 합창의 시간을 열었습니다. 한 15분 정도의 준비시간을 갖고 난 후 공연에 올릴 곡들을 하나씩 체크합니다. 모든 단원이 지휘자의 손끝에 신경을 집중하고 지휘에 맞추어 곡을 연주합니다.
리허설은 대략 2시간 정도의 시간에 걸쳐 진행합니다. 하지만 연습량이 부족하다면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리허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자가 이끌어가기 때문에 많은 지휘자들이 유머러스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표현력이 대단합니다. 필자도 처음 지휘자를 보면서 이토록 카리스마 있고 리더쉽을 가진 사람을 본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어지러운 화음들 속에서 부족한 부분과 과도한 부분을 잘 조율하면서 합창단을 이끌어 갑니다. 또 지휘자마다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새로운 곡을 연주하는 느낌을 주곤 합니다. 그들은 음악을 알려주는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제가 능동적으로 음악에 참여하는 데 일조하지요.
리허설을 진행하면서 참 재밌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김형석 작곡가의 ‘그대 내게 다시’ 같은 경우 굉장히 서정적인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멜로디를 만들어가는 성부가 아닌 다른 성부는 오히려 트로트를 부르는 느낌이었죠. 화음이 되어 하나의 음악이 되기 전까지 단일 파트가 연습을 한다면 굉장히 웃긴 노래가 되곤 합니다. 필자도 공연장에서 봤던 것처럼 자신의 역할을 멋지게 수행해 음악을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성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찾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자주 다른 성부의 음을 쫓아가 버리기도 했지요. 우선 악보에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절대음감이 아니고서야 악보를 보고 바로 음계의 소리를 내는 게 쉬울 리 없었습니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목소리가 작아져 가는 순간 옆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목소리에 제 목소리를 맞추고 상대방의 음과 소리를 따라갔습니다. 합창의 매력과 장점은 이때 드러납니다. 합창은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 음악입니다. 모두가 지휘자의 의도에 따라 동일한 표현을 만들어가는 연주를 하기 때문에 서로의 소리를 더 경청하게 됩니다. 노래의 가사를 부르고 있지만 서로 이끌어주고 당겨주는 힘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전체 구성원 속에 나라는 개인이 존재하기에 음악을 이루기 위해서는 각 단원, 각 파트 간에 하모니를 만들어 내기 위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합창은 사람이 천부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목소리를 이용한 성악의 한 형태입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화음을 이루고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 갈 때 만들어진 음악은 그 어떤 악기의 연주보다 더 듣기 편한 기분을 느낍니다. 뿐만 아니라 언어로 이루어진 가사를 이용해 감정표현이 더 직접적이고 명확합니다.
하지만 합창이 아무리 많은 매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처음부터 완벽한 음악으로 감동을 주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파트를 챙기는데 급급해 다른 성부를 들을 여유조차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딱딱하고 생동감이 없는 연주를 하게 됩니다. 수십 번, 수백 번의 연습을 통해 서로가 합을 맞추고 소리를 듣고 서로 다른 각각의 목소리를 하나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경험해 본 사람은 모두 공감할 감동과 희열이 있습니다. 음악을 만들어가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필자는 너무 좋았습니다. 매번 새로운 곡을 연주할 때마다 엉망인 우리의 소리가 점점 듣기 좋은 음악이 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한다는 사실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의 절정은 공연무대에서 이루어집니다. 멋진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고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 공연을 위해 노력해온 단원들과 지휘자는 눈빛만으로도 의사소통이 충분합니다. 옆에 같이 오랫동안 단원들이 있어 큰 힘이 되고 의지가 됩니다.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으로 늘 우리를 지휘했던 지휘자의 손끝을 집중해 동료 단원들과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그간의 과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순간 개인의 감정은 노래가 되어 합창단 속에 녹아들게 됩니다. 공연을 준비하며 성장해온 필자의 소리와 합창단의 소리는 하나로 어울려 여러 사람이 부르고 있지만 하나의 목소리처럼 하모니를 이룹니다.
지금도 이따금씩 그날 같이 연주하던 곡이 입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음악에 슬픔과 아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날 우연히 포스터를 보고 합창이 가진 매력과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에 제 삶은 분명 더 풍성하고 다채로워졌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면서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같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하나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힘을 써왔던 시간들은 굉장히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삶에 새로운 활력이 필요할 때 꼭 합창이 아닐지라도 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직접 체험해 보라고 권유해 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시고 공유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