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들이 온다!” 영화 300의 카피라이터 문구다. 처음 이 영화가 나왔을 때 아주 독특한 영상미로 인해 관객들이 매료되었다. 이 영화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대군의 침공을 맞은 스파르타군이 불과 300명으로 사흘을 버텼던 테르모필레 전투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스파르타 국민의 구성은 특이하다. 국민 대부분은 전사들이었고 농사나 산업에는 일절 종사하지 않았다.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수십만의 헬로트, 즉 노예들이었다. 이들 노예들에 비해 형편없이 수가 적은 스파르타인들은 당연히 이들 노예를 억누르기 위한 전쟁기술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른바 스파르타식 훈련이라는 엄격한 전쟁 훈련 체계를 만들었다. 특히 이들은 활을 겁쟁이들의 무기라 하여 아주 멸시했다. 스파르타인들의 정신무장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겁쟁이로 찍히는 것에 더 두려움이 컸다.
기원전 490년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가 마라톤 전투에서 극적으로 승리했다. 10년이 지난 후에 뒤늦게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거대한 육해군을 거느리고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려 했다.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터진 것이다. 아테네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연합군이 테르모필레 고개에서 페르시아 육군의 진입을 막고, 동시에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막자고 했다. 침공했던 페르시아군의 규모는 전통적으로는 100만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20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을 맞은 당시 스파르타의 왕은 레오니다스였다. 나라를 떠나 저 멀리에 있는 테르모필레까지 원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레오니다스가 이끌고 가는 군대는 겨우 300명이었다. 왜 이렇게 병력이 적었을까? 자발적으로 왕을 따라 국외로 나갈 스파르타 병사들이 적었기 때문이다. 레오니다스 왕은 델포이의 신탁을 얻으러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신녀는 왕에게 무시무시한 신탁을 내렸다. “왕이 죽지 않으면 스파르타는 멸망할 것이다.” 아마도 이 신탁을 듣고 레오니다스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왕인 자기가 죽음으로서 자기 조국이 구원될 수 있다면… 오늘날 흔히 말하는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를 향해 기동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테르모필레를 통하는 일련의 험로였다. 이를 그리스인들은 예상할 수 있었고, 페르시아군은 그 예상되는 통로를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서 결판을 내야 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 좁은 목에서 막는 것이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자신이 데리고 온 스파르타인 300명을 포함한 그리스 동맹군 7,000명의 육군을 이끌고 테르모필레에 진을 쳤다. 그 중 1,000명만을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정도의 페르모필레 애로에 배치시켰다.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테르모필레에 도착하자 뜻밖의 적은 병력으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스파르타군을 보고 겁을 먹고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라면서 3일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놀랍게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궁수들을 시켜서 활을 쏘게 했다. 이때 한 척후병이 레오니다스에게 절망적인 보고를 했다. “페르시아군이 어찌나 많은지 그들이 쏘는 화살이 해를 가릴 지경입니다.” 그러나 레오니다스는 호탕하게 받아넘긴다. “좋아. 그러면 우리는 시원한 그늘에서 싸울 수 있겠군!” 스파르타식 교육은 엄격한 군사 교육 만이 아니라 절망적 순간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유머와 호방함까지 교육시켰던 것이다. 드디어 페르시아군은 스파르타군을 향하여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좁은 정면에 빽빽이 들어찬 스파르타군은 장창의 방진을 펴고, 페르시아군을 마치 파리를 잡듯이 죽여 넘겼다. 그런데 에피알데스로 알려진 자가 크레르크세스에게 보상을 받겠다는 욕심으로 스파르타군의 뒤로 돌아가는 비밀통로를 안내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이때 레오니다스 왕은 스파르타군만을 남기고 다른 그리스 동맹 군사들은 탈출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만약에 이 기록이 맞다면 마지막까지 남은 병사의 수는 스파르타인의 300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에게는 후퇴란 없었다. 300명만 남은 레오니다스 왕의 스파르타군은 끝까지 남아 절망적으로 버티었다. 칼과 창이 부러지고 나중에는 이빨과 손톱으로 싸웠다. 마침내 그들의 모습은 흡사 피에 주린 야수의 그것과 같이 되어 페르시아군들도 더 이상 접근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페르시아군들은 마지막 일격으로서 화살을 스파르타인들에게 퍼부었다. 이것은 스파르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죽음의 방식이었다. 활은 겁쟁이들의 무기였으니까. 레오니다스를 비롯하여 300명의 용사들은 죽어갔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싸웠다. 스파르타의 300 용사와 레오니다스의 희생 덕분에 아테네는 황금 같은 시간을 벌었고, 이로 인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가 승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페르시아는 약 70년간 그리스를 엿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스파르타의 엄격한 군사적 교육의 역사와 레오니다스 왕의 희생정신을 지금의 서양인들도 그 상층부 엘리트들은 어릴 때부터 뼛속 깊이 배우고 또 배우고 있다.
손자병법 허실(虛實) 제6편에 보면 “비록 적이 많다 하더라도 가히 싸울 수 없게 만들 수 있다.”(敵雖衆 可使無鬪)는 말이 나온다. 적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래도 싸워볼 만하다. 테르모필레 험로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이런 병목지역을 잘 선택한 뒤에 스파르타 용사와 같이 결사각오의 정신만 뒷받침될 수 있다면 승산은 있다. 손자병법 행군(行軍) 제9편에 보면 “병사가 많다고 해서 이로운 것만은 아니다. 다만 그 병력을 믿고 제멋대로 나아가지 않고, 힘을 충분히 모으고, 적을 잘 살피고, 병사들의 마음을 똘똘 뭉치게 해야 한다.”(兵非多益 惟無武進 足以幷力 料敵 取人而已)고 말하고 있다. 병력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먹여 살려야 할 식량도 많이 들고 지불해야 하는 급료도 많이 든다. 그래서 잘 훈련된 적정수의 병력이 가장 좋다. 실제로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상대해서 이긴 예는 많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으로 133척을 상대했던 명량대첩, 권율의 3000명이 일본군 3만을 상대했던 행주대첩, 포르투갈 함대 12척이 투르크-인도 연합함대 300척을 상대했던 디우해전, 핀란드군 30만 명이 소련군 148만 명을 상대했던 겨울 전쟁, 국군 35명이 중공군 800명을 상대했던 베티고지 전투, 국군 294명이 월맹군 2000명을 상대했던 짜빈동 전투, 신라군 3만 명이 당군 20만 명을 상대했던 매소성 전투, 프랑스군 800명이 베트남군 12,000명을 상대했던 쟈딘방어전, 주나라 46,000명이 은나라 70만 명을 상대했던 목야대전 등 이루 셀 수 없다.
敵雖衆 可使無鬪
적수중 가사무투
비록 적이 많다하더라도 가히 싸울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상대할 때의 요령을 정리하면 이렇다. 좁은 목을 선택해서 먼저 점령한다. 그리고 잘 훈련된 부대를 죽을 각오의 정신교육을 시킨 후에 지킨다. 살다보면 엄청난 숫자 때문에 기가 질려 손을 놓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기억하라.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 주눅 들지 말라. 임전무퇴, 항복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 이러한 스파르타의 정신으로 사업을 한다면 아마도 성공하지 못할 사업가는 없을 것이다. 테르모필레 전투 이후 전사자들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시인 시모니데스은 비문에 그들을 위한 유명한 시를 바쳤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스파르타의 사람들에게 가서 전해주시오. 당신의 법을 받들어 우리들, 여기 잠들었노라고.”
스파르타의 정신으로 용기 있게 살아가자.
敵 雖 衆 可 使 無 鬪
적 적 비록 수 무리 중 옳을 가 하여금 사 없을 무 싸울 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