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태초다. 태초의 인간은 새벽처럼 어질고 가식이 없었으리라. 밤새 어지러워진 도시의 새벽은 가식이 없다. 먹다 버린 쓰레기, 먹고 넘쳐서 토해낸 오물, 낡아서 버린 물건들, 그래서 비틀거리는 가슴 가슴들! 새벽에는 이 모든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있는 그대로의 순수를 보여 주는 곳, 필자는 그런 새벽이 어디 없을까 생각하다가 오지 중의 오지 강원도 정선을 떠올렸다.
정선에는 백두대간이 있다. 덕산기계곡이 있다. 평소 같으면 감히 엄두도 못 냈을 백두대간을 오늘은 타 볼 요량이다.
희뿌옇고 습습한 기운을 몸에 묻히며 광화문에서 버스에 오른 시간이 이른 6시 40분. 잠시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평창 휴게소다. 살림살이 어렵다고, 허리띠를 너무 졸라매서 등과 배가 맞붙을 지경이라며 죽는 소리해대던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는지 휴게소의 주차장은 만원이다. 사람들 표정도 밝다. 이들도 어딘가 자신들의 새벽을 찾아 나선 모양이다.
정선군청에 들러서 안내할 직원분과 백두대간 트레킹 코스 초입에 도착했다. 출발지인 반점재는 정비가 덜 되어서 어설펐으나 불과 10여 분을 올라갔는데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솔길을 가운데로 하고 한쪽은 낙엽송, 다른 한쪽은 정글을 방불케 하는 잡목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사방을 둘러봐도 푸른색 일색이다. 뿐만 아니라 여름을 장식하는 들꽃들이 푸른색을 바탕으로 십자수를 놓았다. 그에 덧대어 적막하기 그지없던 산길에 사람 꽃도 피었다.
한참을 올라가니 운치 있는 정자가 숨이 턱까지 찬 우리를 반긴다. 정자 옆에는 백두산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 백두산(높이 2,744m)! 백색의 부석(浮石)이 얹혀 있어서 마치 흰머리와 같다하여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국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 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숭배한 산이란다.
정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 경치가 좋기로 이루 말할 수 없다. 수려한 경치 한 가운데 촌락이 있는데, 앞에는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잘 정돈된 들판이 있고, 심산유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이에 늠름하고 기상 높은 백두산이 마을을 지키듯이 굽어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산수화에서나 봄직한 현존하는 마을이다. 그 경치를 보는 순간 너무나 흥분이 되어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역시 경치만 있는 것보다는 사람의 훈기도 함께할 때 비로소 감제고지가 되는가 보다.
사람 둘이 겨우 걸을만한 오솔길에 산나리가 아는 체한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푸른색 가운데 있어서인지 짙은 주황색이 곱기도 하다. 나리꽃에 정신이 팔려 일행과의 거리가 꽤나 떨어졌다. 내심 무섬증이 들었지만 그것도 순간이고 차라리 백두산 호랑이라도 나타났으면 하는 가당찮은 생각이 든다.
산이 높은 만큼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았지만 계단을 만들어 놓고 곳곳에 의자나 평상을 두어서 숨이 가쁠 때쯤이면 쉬어가는 장소도 마련해 두는 센스가 만점이다.
이제 설악산이다. 높이 1,708m, 우리말로는 설뫼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1982년 8월에 유네스코의 ‘생물 보존권 지역’으로 지정된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산이다. 2018년 동계올림픽이 평창에서 열리면 유네스코에 등재된 설악산이 세계인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
언젠가 설악산으로 여행을 왔다가 배탈이 나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던 설악산을 오늘 밟는 기분이 남다르다. 아싸! 속으로 기쁨을 가슴과 뼛속에 깊이 들이마시며 가리왕산으로!
가리왕산(1,560m), 가리왕산은 태백산맥에 속하였으며, 송천(松川)이 시작되는 곳이다. 송천은 강원도 대관령에서 시작하여 정선군에서 남한강 상류로 흘러들어 가는 길이 62.1km의 내(川)다. 가리왕산은 전형적인 육산이며 능선에는 온갖 수목이 울창하다.
가리왕산 능선에서 또 하나의 마을을 볼 수 있었다. 이 마을 또한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송천이 있어서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소백산맥의 한 지맥인 속리산(1,058m), 우리나라 8경의 하나인 제2금강, 또는 소금강이라고도 불리는 속리산이지만, 내가 높은 곳에 서 있는 동안은 그 아름다움의 내용을 보고 느낄 수가 없다.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산은, 자신이 오른 산은 당장 코앞의 것만 느낄 수 있지, 정작 바라보고 그 위용이나 그윽함에 감탄을 하는 것은 멀리 있는 산이다. 이젠 나도 내 우리에서 빠져나와 먼발치에서 나를 봐야겠다. 역지사지를 생활 속 깊이 끌어들여야겠다. 산은 결코 잘난 척하지 않았지만 내게 큰 스승이 되었다.
속리산을 거쳐서 주봉이 천황봉인 계룡산(845m)에 올랐다.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계룡산은 20여 개의 봉우리가 남북으로 이어진 모습이 닭의 볏을 쓴 용처럼 생겼다고 하여 계룡산이라고 부른단다. 계룡산에는 올곧게 뻗은 낙엽송이 일품이다. 어느 것 하나 휘지 않고 1자로 곧게 뻗은 낙엽송을 닮은 위정자들이 넘치는 대한민국이 머잖아 오겠지.
드디어 정선 백두대간의 마지막인 지리산(1,915m)이다.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 전라남 북도와 경상남도, 3개 도에 5개 군에 걸쳐 있는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맥에서 흘러왔다고 하여 두류산이라고도 부른다.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근현대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중요한 산이다. 둘이서 어깨를 부비며 걸을 오솔길이 있는가 하면 비상시에 자동차가 오르내릴 수 있는 임도가 있어서 걷기에 그다지 무리가 없는 좋은 트레킹 코스다.
지리산을 마지막으로, 문곡리에서 백두대간은 끝났다. 그렇게 여섯 개의 산을 디디며 걷는 데 쉬는 시간 포함해서 세 시간이 걸렸다. 간단한 간식을 먹었지만 시장기가 돈다. 약간의 시장기는 자연을 대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도 했다. 배고픔은 이렇게 좋은 경치를 그냥 보고 걷게 해 주시는 자연에게 덜 미안한 마음이기도 하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트레킹코스는 갈래길이 없어서 쉬운 길이다. 하지만 산 이름값은 지불해야 하는 묘미가 있는 코스다. 하나 아쉬운 점은 화장실이 없다는 것이다. 군청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산을 깨끗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라는데, 글쎄!
마을 어귀의 밭에는 옥수수와 감자를 심어서 여기가 강원도 땅임을 실감케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채소를 심은 밭은 두 종류가 있다. 채소 사이로 풀이 많은 밭과 풀이 전혀 없는 밭이 있다. 풀이 없는 밭의 채소는 제초제를 뿌린 뒤에 채소를 심는다. 풀매기에 얼마나 힘이 들면 그럴까 하고 이해는 가지만, 농약이나 제초제에 무딘 농부들의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다.
반면, 비록 수확은 적을지라도 정직하게 씨를 뿌려 풀과 함께 자란 채소는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 시골에서 직접 지은 농산물이라고 안심하고 먹는 우리의 먹을거리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안 보는 게 약이지.
오늘 점심은 덕우리 마을회관에서 먹기로 했다. 우리를 인솔하시는 분이 덕우리 이장님께 부탁을 해서 특별히 강원도의 별미인 곤드레밥을 해 주기로 했단다. 마을회관으로 가는 길에 ‘무릉도원이 여기 있소이다’라는 문구와 함께 덕우리 세자 마을 항공사진이 인쇄된 표지판이 자랑스럽게 서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기에 감히 무릉도원이라 자칭하는지 궁금하다.
덕산기계곡,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곳! 정선군청 홈페이지에 소개되지 않은 꼭꼭 숨은 비경! 강원도 정선군 남면의 덕산기계곡은 총연장 12km로 100여m의 충암절벽(뼝대) 병풍으로 둘러싸여 있다. 상류에는 100m 이상 되는 울창한 낙엽송지대와 바위너래지대(넓고 평평한 바위)를 형성하고 있다. 덕산기계곡의 특성은 물속이나 가변길이나 거의 자갈이 깔려 있어서 걷기에 경쾌하고 모래보다 수월하다. 비가 온 후에는 덕산기계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하지만 장마 뒤에는 물이 많아서 물길을 걷는 재미는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계곡 군데군데가 웅덩이로 파진 곳이 있어서 무척 위험하기도 하다.
이래서 무릉도원이라고 했구나! 기암절벽 병풍에 일월오악도를 그렸으면 참 좋겠다. 맑고 푸른 물에 불혹을 넘긴 이들의 웃음소리 또로록 구르니 귀가 웃는구나. 이렇게 고상한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입은 채로 물에 온 몸을 담그는 사람들! 헤엄치고 물싸움도 하며 즐거워하는 모양이 어린이가 따로 없다. 즐겁다기보다 유치하게 논다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살아온 세월이 얼마 안 되는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모름지기 사람이 행복하고 즐거우려면 조금은 유치해지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계곡물 건너기를 열대여섯 차례하고 나니 덕산 1교가 나오고, 조금 더 가니 1박 2일 촬영지가 나왔다. 방송을 타면 찾는 이가 많을 것 같은데 이곳은 아직 한가해 보인다. 그만큼 골이 깊어서 그런가! 물길을 걸으면 소화가 더 잘 되나 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따 먹느라고 바쁘다. 보니, 길가에 흐드러진 산딸기와 산뽕의 오디에 푹 빠져있다. 오디를 먹어 파래진 입을 서로 보며 웃는다. 계곡물에 입을 씻다가 그냥 마신다, 물은 사람만 좋아하는 게 아닌가보다. 꽃양귀비도 물에 발목을 담그고 배시시 웃는다.
오늘은 드물게 많이 행복했다. 백두대간은 퉁퉁 불은 엄마 젖가슴처럼 넉넉하고 포근했다.
덕산기계곡은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는 멋진 아빠처럼 삶의 무게를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좋다, 참 좋다.”라는 탄성이 절로 터지는 곳이었다.
새벽을 만났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일부러 꾸미지 않은 새벽을 나는 보았다.
백두대간과 덕산기계곡을 가려면 정선 군청에 문의하면 안내해 준다.
정선군청 주소 :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봉양3길 21 (우 : 233-701)
TEL : 033-562-3911 FAX : 033-560-2510 관광안내 : 1544-9053
정선군청 홈페이지 : www.jeongseon.go.kr
덕산기계곡 가는 길
주소 :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북동리
준비물 : 배낭착용은 필수, 트레킹화, 아쿠아트레킹슈즈(계곡트레킹에 대비), 스틱, 여벌옷과 양말, 수건, 식수, 우천 시의 대비 물품 등등.
곤드레밥을 먹은 대촌마을 청년회 총무 박기출씨 전화 010-7191-2098
단체가 아닌 가족단위나 서너 사람일 경우에는 그냥 시골 밥상으로 해 드린단다. 예약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