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라는 말을 대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정현종 시인의 “나는 가끔 후회한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우리네 세상살이에 가장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빨리 갈 길을 재촉하고, 빨리빨리 판단하도록 우리를 옥죄는 현실에서 삶을 돌아다보면 아쉬운 후회의 순간이 많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간사를 시인은 다음과 같은 간결한 시어로 정리해서 우리에게 던졌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 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 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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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오늘 아침에도 나는 짧은 명상을 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면서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고 더러운 찌꺼기와 혼탁한 생각의 불순물들이 발가락 끝으로 빠져나가는 상상을 한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나와 타인들에게 꽃봉오리를 만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염원했다.
뇌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 한다고 한다. 우리의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즐거워하고 웃는 사람에게는 엔도르핀이 생성되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여기에서 작은 진실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명상을 통해서 긍정의 씨앗을 매일 뿌리고 또 뿌린다. 그 결과로 나의 명상은 가끔은 제대로 되는 것 같다.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8에서 13헤르츠 주파수대의 알파파 상태가 이런 것이구나. 느껴지는 날이 그런 때 인가보다.
후배의 제안에 시작한 나의 버킷리스트를 써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나를 관조해 본다. 요즘은 수명 100세 시대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어떤 이는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 나에게 묻기도 한다. 나이 오십을 넘었으니 과연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질문에 답을 하고자 오늘은 가만히 내 자신을 들여다보니 나에게 있어서 지금부터의 인생은 후반전이 아니라 인생 이모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후반전은 아직 끝나지 아니한 승부의 세계를 향하여 오직 골문을 향하여 돌진해야 하는 선수들이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모작은 새로운 활력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유일한 공통 조건인 하루 24시간이라는 틀을 가지고 만들어가는 경기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완전히 이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인생은 승부에 따라 울고 웃는 경기로만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들”이라는 영화 속 메시지를 생각하며 나의 인생 이모작 시기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본다.
임종의 시간을 맞이하여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앞만 보고 달려온 나의 삶, 일에 치어서 허덕거리며 살아온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가 적은 인생을 위한 나의 약속을 적어 둔다면 하나씩 하나씩 실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한 일 아니겠는가?
그동안 미친 듯이 일하며 달려왔으니 인생 이모작을 위해서는 우선 나의 취미 생활을 돌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는가? 묻고 답해보니 우선 학창시절에 가까이했던 시 쓰기부터 다시 해야겠다.
① 유안진 교수의 글 “지란지교를 꿈꾸며”와 같은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를 일 년에 한 편 이상 쓰며 살아야겠다. 학창시절에는 이 글을 읽고 내 글의 부끄러움으로 잠시 붓두껍을 덮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편안하게 그저 나 자신에게 충실한 글이라면 졸필이라도 만족하며 쓰면 되지 않겠는가.
첫 번째 나와의 약속에서 벌써 나의 마음은 따뜻함과 설렘이 가득한 문학 소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이 얼마나 기쁜 약속인가? 두 번째도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세워봐야겠다. 쉬운 일이지만 하루하루 미루다가 여태 해보지 못한 일.
② 경춘선 전철 타고 여행해보기. 누구랑 함께 가는 것이 좋을까? 학창시절 대성리, 강촌 가던 기분으로 친구들과 가야 할까? 아내와 가야 할까? 이것 또한 즐거운 상상이다.
세 번째는 당장 내년에 이행해야 할 일이 있다. 올해에 예약 다 해놓고 시간을 못 내어 실천하지 못했던 일이다. 내년에는 꼭 이루어야겠다.
③ 제주도 바닷가에서 아내와 함께 별 헤는 밤 보내기. 생각만 해도 흐뭇한 일을 왜 실천 못하고 살았던가? 나의 버킷리스트는 그저 소박한 것 뿐이로구나! 나를 중심으로 생각했으니 이제 주변을 돌아보자. 그래 하나뿐인 누나가 부산에 사는데 그저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못 만나니 이 또한 늘 미안했던 일인지라 이번에는 생각했던 것을 적고 실천에 옮겨야겠다.
④ 부산에 사는 누나 가족과 함께 대마도 여행가기.
거리도 가깝고 부산이랑 뭐 그리 다를 것도 없을 런지 모르지만 그래도 부산을 떠난다는 여행 기분은 느낄 수 있고, 나아가서 일본 냄새는 나겠지? 이제 배타고 대마도 여행도 다녀왔으니 뭔가 지식 나눔 행사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강산이 두 번 이상 바뀐다는 세월을 방송국에서 생활했으니 이러한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겠는가? 옛날 텔레비전, 라디오 중심시대에서 모바일, SNS 시대로 미디어 환경이 변화하는 시점에 어떤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어서 어떤 플랫폼에 어떻게 서비스하는 것이 방송장이들의 앞날을 밝혀 줄 것인지? 하는 화두에 답을 같이 찾을 겸해서 방송영상 관련 학문을 하는 후학들에게 강의하는 선생님이 되면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지 않겠는가?
⑤ 미디어 변화 시기를 한발 앞서 내다보며 새로운 미디어 시대를 준비하는 강의를 재미나게 하는 교수 되기.
⑥ 강의 제대로 하려면 ‘일일신 우일신’ 해야 하는 것이니 내친김에 박사학위 따기. 박사 학위 따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처럼 반은 다가간 것 아니겠는가? 기왕 박사학위 따려면 누구나 알아준다는 SCI 등재지에 논문 한 편은 등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미래의 기둥이라는 학생들을 위한 계획도 세웠으니 회사 밖 생활은 이 정도로 박차를 가해서 가기로 하고 회사 내부를 살펴보면 뭔가 부족한 것이 있을 터인데…. 그래, 요즘은 선배 대접하기보다 어려운 것이 후배 챙기기 아니겠는가? 늘 하는 일이 바빠서 가까이 살갑게 대화하는 후배들이 없으니 이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삶이 아니겠는가.
⑦ 나를 참선배로 인정하고, 직장 생활의 좋은 역할모델로 생각하며 따르는 후배 만들기. 이것은 많이 만들수록 좋은 것이지만 생각처럼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닌지라 목표를 몇 명으로 세워야 하나? 고민이로세. 인생에서 참 친구 세 명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는 말도 있으니 목표를 거창하게 3명 만들기로 해야겠네. 이런 노력하다 보면 벌써 직장 정년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년 가까이 가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래 정년 전후에는 아내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내가 언젠가 ‘우리도 크루즈 여행해 보는 것 어때?’ 묻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래 해보자고 자신 있게 대답해야겠다.
⑧ 직장 은퇴 전후에 아내와 크루즈 여행하기. 배안에서 재미있게 파티를 즐기려면 댄스도 배우고 해야 한다는데 댄스는 또 언제 배울까? 디스코라면 해볼 만한데… 어찌 되었건 기력 있을 때 꼭 해볼 일이야. 그리고 은퇴 후에는 무엇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좋고, 산과 들을 가까이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하는 일 아니겠는가? 평범한 인생도 가치 있는 것이니 그것도 괜찮은 일이지만 교육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의 정신을 세계에 심고,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이름 드높이는 일을 해보면 더 보람된 일이 아니겠는가? 요즘은 은퇴 후에 동남아 국가에 방송 노하우를 전수하는 파견 봉사단도 모집하고 있다. 그동안의 지식과 경험으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⑨ 은퇴 후에는 해외봉사단으로 활동하거나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등 국제결혼으로 한국과 관계를 맺은 나라에 가서 한국학교를 세우거나 기존의 한글학교 같은 곳에서 한국어도 가르치고, 방송과 IT 기술도 전파하고 하는 보람된 일을 해야겠다. 세월의 흐름에 대한 느낌이 화살보다 빠르니 은퇴 이후의 계획이라는 이러한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같은 일을 하는 직장 동료와의 관계도 돈독히 하고, 마음을 가까이 두고 있는 친구들과도 소홀함이 없도록 지내야겠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잘 가꾸고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⑩ 고향 친구들과 1년 한 번 갖는 모임 꼭 지키기.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니 벌써 열 가지가 되었다. 다시 읽어봐도 뭐 그리 대단 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왜 항상 현실 핑계를 대면서 미루어 왔던가? 버킷리스트 책을 읽어보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의 버킷리스트가 눈에 띈다.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들은 너무도 평범한 일상의 일이었다. 그들도 건강했던 시절에는 불편함이 없이 늘 해왔던 일이다. 그런데 건강을 잃으니 ‘사과 한 쪽을 먹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구가 간절해진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여행은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다. 늘 비슷한 여정 같지만 사실은 어제와는 다른 오늘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죽음에 임박하여 느끼는 알찬 인생이란 무엇인가? 면벽 수양이라도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인가? 답은 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소망한다. ‘오늘 저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시고,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음에 매일 감사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고은 시인의 시는 나의 인생 이모작에 등대가 될 것이다.
“그 꽃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 방송과기술 VOL.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