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도시 피게레스와 알비

화가들의 도시 피게레스와 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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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지 MBC 제작기술국

작년 이맘때인 10월, 입사 5년 만에 첫 휴가를 얻었습니다. 그것도 무려 열흘이 넘는… 어느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 할까 하는 마음에 한 달여를 고심하다 결국 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를 횡단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학시절 남들이 다가는 배낭여행을 못 해봤기에 큰 기대와 부푼 꿈을 안고 떠난 첫 유럽여행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생소한 곳임에도 겁 없이 렌터카를 이용해 바르셀로나부터 로마까지 2천km를 넘게 돌아다녀 보니, 이제는 유럽이라는 곳이 나름 익숙해지기도 하고 지금은 매우 그리운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긴 여행 중 거쳐 간 유명한 도시들과 관광지들도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스페인 북쪽에 위치한 피게레스(Figueres)와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알비(Albi)라는 작은 마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두 마을이 제게 특별했던 것은 세계적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툴루즈 로트렉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기도 하며, 두 곳 모두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일 정도로 주변경관도 빼어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박물관과 미술관 돌아보기를 좋아하는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천재 화가 달리(Dali)의 고향 피게레스
바르셀로나에서 북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피게레스는 스페인이 자랑하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고향으로 유명합니다. 스페인 출신 화가라면 우리에게는 피카소나 고야가 떠오르지만, 스페인 현지나 유럽에서는 살바도르 달리 또한 앞선 두 사람 못지않게 유명한 화가입니다. 초현실주의의 대가라고 불리는 달리는 특유의 천재성과 독특한 외모, 언행으로 20세기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친 화가였습니다.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기억의 지속

대표작으로는 ‘기억의 지속’이 있는데, 이 작품은 흘러내리는 시계가 인상적으로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본 기억이 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서도 달리의 흔적들은 쉽게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는 사탕 ‘츄파춥스’의 로고도 그가 즉석에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곳 피게레스에 그가 직접 디자인한 살바도르 달리 박물관이 있었습니다.

“나는 천재가 될 것이다. 세상이 나를 숭배할 것이다.” – 살바도르 달리 –

달리박물관은 붉은색 타일로 장식한 외벽과 계란 모양의 조각들로 되어 있어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 전체에 그가 생전에 남긴 그림들과 기괴한 조형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과 개성들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과연 천재란 다르긴 다르구나!’하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피게레스에 위치한 달리 박물관
피게레스에 위치한 달리 박물관

그림4

박물관에 전시된 그의 작품들
박물관에 전시된 그의 작품들

실제로 그는 본인이 천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천재성으로 달리는 초현실주의라는 화풍을 만들어냈고, 살아생전 온갖 명성과 부를 누린 몇 안 되는 화가였다고 합니다. 유럽여행을 하다 보면 미술관과 박물관을 정말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달리 박물관은 유럽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작품들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누구나 그의 작품을 보고 빠져들기에 충분한 그런 곳이 바로 달리박물관이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숙소로 향한 곳은 피게레스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카다케스라는 곳으로 해변을 끼고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카다케스는 달리와 그의 영원한 연인 갈라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달리는 스승의 부인이었던 10살 연상의 갈라를 보자마자 불같은 사랑에 빠져 평생을 함께 지냈고, 갈라가 죽자 이곳 카다케스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마을 앞으로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있어서 스페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휴양지이기도 합니다.

카다케스
카다케스

마을 주변에는 휴양지답게 고급 주택들과 식당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을의 크기가 크지 않았기에 두세 시간 정도 걸어서 달리의 생가와 바닷가를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달리의 생가는 방문하기기 전에 꼭 사전예약을 필요로 하는데, 이곳에서 달리의 명성에 걸맞는 화려한 인테리어로 장식된 집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물랑루즈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Lautrec)
다음으로 향한 곳은 피게레스로부터 200km 정도 떨어진 프랑스 남부의 알비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곳은 옛날부터 프랑스 남부 교역의 중심지로 마을 전체가 붉은 기와로 만들어진 집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인상적인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은 화가 로트렉의 고향이자 그의 미술관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마을입니다.

툴루즈 로트렉
툴루즈 로트렉
로트렉 미술관
로트렉 미술관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다면 난 결코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 툴루즈 로트렉 –

화가 로트렉의 가슴 아픈 일생은 얼마 전 MBC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 알비의 유명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근친 혼인으로 인한 가족력 때문에 어린 나이에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고 평생을 지체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키가 152cm에 불과한 장애인으로서 가지게 되는 열등감과 가족들의 냉대는 결국 그를 파리로 쫓아내게 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사창가와 술집을 전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화려한 도시 속 뒷골목의 밤 문화가 그에게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숨기고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당시 유행했던 풍경화를 그리지 못하게 된 로트렉은 자연스럽게 주변에 있는 하층민들의 삶을 담은 그림들을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주로 매춘부 여성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표현했다기보다는 삶에 지쳐 고통과 슬픔을 지닌 대상들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림9

로트렉의 작품들
로트렉의 작품들

다양한 색채와 감각적인 선으로 그려낸 여인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로트렉이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또 그곳에서는 로트렉 어머니 초상화를 여러 점 볼 수 있었는데, 이 그림들을 통해 장애를 가진 아들의 재능을 믿고 끝까지 보살펴준 어머니의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어머니가 37세의 나이에 매독으로 요절한 아들을 그리워하며 생전에 그가 남긴 그림들을 기증해 만든 것이 이곳 로트렉 미술관으로, 프랑스 남부에 있는 미술관 중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미술관을 나오면 아름다운 정원과 강이 흐르는 마을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장미마을’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아름다운 붉은 건물들이 마을 전체에 가득합니다. 미술관 옆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라는 세실대성당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유럽여행을 하면서 지겹게 보는 것이 성당이지만, 세실대성당은 그중에서도 화려한 내부 장식과 독특한 천장으로 지닌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세실 대성당과 장미빛 마을 알비
세실 대성당과 장미빛 마을 알비

2015년을 보내며
여행을 다녀온 후 6개월이 흐른 뒤 우연히 광화문에 있는 시네큐브 독립영화관에서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2011년 개봉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작품성으로 재개봉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소설가인 주인공 ‘길’이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타임머신 마차를 이용해 1920년대의 과거로 돌아가 피카소와 헤밍웨이 등 유명인물 들을 만나게 되는 코미디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즐거웠던 점은 살바도르 달리와 툴루즈 로트렉을 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달고 이상한 농담을 하는 달리와 물랑루즈에 앉아서 서글프게 술을 마시는 로트렉이 나오는 장면에서 저는 관객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었습니다. 평소라면 문화적 차이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을 대사와 장면들이 지난 여행을 통해 공감되는 것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이처럼 저에게 피게레스와 알비 여행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두 화가를 만나는 기회였으며, 그들이 만들어온 문화와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다시 여행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더 많은 화가들의 삶과 작품들을 통해 유럽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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