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단풍(雪嶽丹楓)

설악단풍(雪嶽丹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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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효식 OBS 기술1팀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입니다. 1년에 1번 등산하시는 분들이 산에 가는 철이지요. 어느 산을 갈까 행복한 고민을 합니다. 피아단풍을 보지 않고 단풍 봤다는 소리 말라는 지리산, 단풍놀이하면 첫째로 떠오르는 내장산, 가까운 북한산, 누가 뭐래도 설악산. 고민은 길었으나 결정은 뜻밖의 순간에 이뤄졌습니다. 송신소 야간점검을 하던 새벽, 도도하게 빛나는 오리온자리를 보면서 ‘아 별 보러 가야겠다.’ 싶었지요. 당장 달려가고픈 심정으로 산장을 예약대기하고 버스편을 알아봅니다. 산은? 설악산. 단풍이 시작되는 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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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산장 대기신청이 예약으로 전환되어 중청 산장을 예약했습니다. 뭐, 예약이 안 되면 양폭이나 수렴동 산장으로 가면 되니 것도 좋다고 생각했지요. 07:35 동서울발 버스는 10:00시도 안 돼서 속초에 저를 데려다 놓습니다. 터미널을 나와 우측을 보면 저만치에 시내버스 정류소가 있습니다. ‘저기서 7번을 타면 30분이면 설악동이렷다’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저는 이미 등산 중입니다.

아뿔싸! 차가 긴 줄을 이루고 움찔움찔 가다 서다를 반복합니다. 설악동 이정표에서 우회전을 하자마자 시작된 정체는 제 속에서 짜증으로 바뀌어 산행의 흥분 지수를 슬금슬금 넘어서려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단풍 절정기, 인파는 예상했으나 자동차는 예상 못 한 제 탓인 게죠. 이미 11시 30분, 지금 산행을 시작해도 중청 산장까지 빠듯할 텐데 싶지만 속수무책, 마음만 동동거립니다.

11:45. 드디어 설악동 주차장입니다. 오늘 걸을 거리는 약 10Km, 6시간 정도로 예상합니다. 설악동에는 아직도 매표소가 있습니다. 국립공원입장료가 아닌 문화재관람료를 무려 3000원 지불하고 신흥사는 곁눈질로 지나갑니다. 억지 시주를 받고 앉아있는 청동불상이 크고 시커멓게만 느껴지는 건 저 혼자뿐일까요. 구름다리를 건너(사바세계를 벗어나)니 본격적인 숲길이 울울창창 펼쳐집니다. 쭉쭉 뻗은 참나무, 소나무들이 아직 싱그러운 초록입니다. 난쟁이 대나무 같은 조릿대가 초록의 풍성함을 더해줍니다. 조릿대라는 이름은 ‘조리를 만드는 대나무’라는 뜻입니다. 얘들 잎으로 조릿대배를 만들 수 있답니다. 저도 언젠가 책으로 배운 뒤에 꼭 한번 써먹어야지 하면서도 한번 못 만들어 봤는데, 마침 친절한 숲해설 안내판을 따라 배를 접어봅니다. 그럴듯합니다. 애들이랑 같이 오면 좋은 놀이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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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분여를 부지런히 걸으니 깎아지를 듯한 절벽들로 둘러싸인 너른 바위가 나옵니다. 비선대. 신선이 되어 날아오른다는 곳. 바위에 음각된 일필휘지의 한자들이 날아오를 듯 힘찹니다. 선조들도 똑같습니다. 명승지에 낙서하는 건 말이지요. 사실 전 세계가 똑같습니다. 중국 태산은 산 전체가 화선지더군요. 파리 개선문에 한글 낙서가 많다고 어글리코리안이니 하지만, 한국인 눈에 한글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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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굴 0.6Km 이정표 앞에서 주춤합니다. ‘0.6밖에 안 되는데 올라갔다 가자’, ‘이미 늦었는데 언제 중청 가려고?’ 속으로 옥신각신하다, 오르기로 합니다. 인파에서 멀어지니 이제야 산에 온 듯합니다. 노랗고 빨간 가을색으로 한껏 치장한 나무들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제 다리는 벌써부터 후들리고. 거의 60도 경사의 철제 계단을 꾸역꾸역 헥헥대며 올라서니 수직 절벽에 뻥 뚫린 금강굴이 그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석굴 천장에는 저마다의 소원을 매단 연등이 빼곡히 걸렸고 어둑신한 안쪽으론 부처님이 정좌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되어 살며시 뒤돌아보니 아, 이것이군요. 금강산 일만이천봉은 본 적 없지만, 설악산 일만이천봉이 바로 여기입니다. 삐죽삐죽 울쑥불쑥 힘차게 솟은 봉우리들이 서로 제가 잘났다고 다투는 듯한, 다투면서도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어우러지면서도 속 깊이 물을 품었습니다. 왜 여기에 금강굴을 팠는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 옛날 무슨 기술로 여길 만들었을까요?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을까요? 오늘 일정은 모두 파하고 그냥 앉아 그윽하게 넘어가는 해를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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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굴에 마음 한쪽 떼어놓고 내려옵니다. 많이 지체됐네요. 생각보다 많이 가팔랐습니다. 마음은 바쁜데 길은 정체입니다. 끊길 새도 없이 물밀 듯이 내려오는 등산객들로 인해 옆으로 비켜서서 대기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제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된 기분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살아야겠다. 대중에 휩쓸리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삶, (말로는 쉬운데)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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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스스로 너무 붐업됐나요. 덩달아 대장도 붐업입니다. 아직 산장까진 한참인데 ‘음 이거 참’, 명색이 국립공원인데 노상방분(?)을 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게다가 (방분하기) 적당한 곳도 안 보입니다. 군대 때였습니다. 참호 훈련 나갔다가 신호가 왔습니다. 마침 우리 소대가 고지 방어 중이였는데 사방에 평평한 장소가 안 보여서 시야만 차단되는 장소를 간신히 골라 일을 보기로 했습니다. 가파른 경사면에 엉덩이를 산 아래로 향하고 앉으니 나름 깊이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더군요. 근데 발밑이 불안정한 탓인지 다리가 점점 저려 오는 겁니다. 이대로 가다간 다리가 풀려 (철퍼덕) 주저앉아 버리지 않을까하는 (엄청난) 걱정이 불현듯 들어 일단 눈앞의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잡고는, 양다리에 번갈아 무게를 실어주니 서서히 전율 같은 쾌감이 허벅지로 번지면서 서서히 근육이 풀리고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루마리(휴지)를 집으려는 찰나 그만 헛손질로 두루마리가 구르고, 비탈을 타고 계속 구르고, 굴러가는데, 마냥 바라볼 뿐 일어서지도 못하고 저 밑으로 까마득히 처박히는 모습을 쪼그리고 앉아 봤습니다. 아 그때의 막막함이란… 문득 떠오른 오랜 기억에 혼자서 한참을 웃으며 걸었습니다.

15:30. 2시간 만에 양폭산장에 도착합니다. 양쪽의 물길이 만나는 지점이라 한여름이면 귀가 먹먹할 정도로 물소리가 우렁찬 곳인데, 가뭄은 가뭄이군요. 고즈넉합니다. 슬슬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갈 태세라 등산객도 이젠 띄엄띄엄합니다. 양폭은 설악산 초입이라 한적한데다 널찍한 데크가 있어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산장입니다. 안타깝게도 작년에 왔을 때는 그 얼마 전 불이 나서 폐쇄 상태더니 완공을 한 모양입니다. 새로 지은 산장은 데크가 거의 없고 뭔가 견고한 성채 같은 느낌입니다. 예전 산장이 그립네요. 하긴, 아무리 잘 지었어도 추억의 상대가 될 순 없겠지요. 다리쉼도 없이 바로 희운각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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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폭을 뒤로 하고 가파른 계단에 올라서면 천당폭포가 있습니다. 철제 데크를 따라 층층이 폭포를 이루고 물길을 내었습니다. 힘겹게 올라온 뒤라 그 청량감이 남다릅니다. 천당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맘껏 즐기며 두 봉우리 사이 거대한 암반에 긴 발코니처럼 걸린 데크를 철컹철컹 소리 내며 걸어갑니다. 발밑으로 옥색의 물빛이 어른거립니다. 또 한 계단 올라서면 귀면암입니다. 천당폭포에서 목욕하던 선녀들이 귀신을 쫓아달라고 신선한테 부탁해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는데, 저는 아무리 봐도 귀신 얼굴은 안 보이고 육중한 크기의 바위가 가분수 형태로 서 있는 게 위태로워 이 밑에 오래 있다간 정말 귀신 될지 모르겠단 생각만 듭니다.

16:40. 무너미고개. 응급헬기장이 멋진 전망대가 되는 곳입니다. 해는 산등성이에 걸려 있습니다. 지칩니다. 너무 지칩니다. 역시 금강굴은 무리였습니다. 등산화가 납덩이같아 얼른 벗어 버리곤 아예 자리를 펴고 훌러덩 눕습니다. 등산용 돗자리인데, 제가 생각해도 참 잘 산 아이템입니다. 얇아서, 말면 작은 물병사이즈고 쫙 펴면 네다섯은 둘러앉을 수 있지요. 비 올 땐 판쵸우의, 추울 땐 바람막이, 해가 쨍쨍한 날엔 그늘막입니다(등산 스틱을 세워서 홈에 끼우면 기가 막힙니다). 황금빛 햇살을 받은 봉우리들이 금덩어리인양 빛나는 경치를 보며 커피 한 잔 합니다. 휴우, 언제 중청까지 가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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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운각 산장에 도착해 혹시나 하고 물어봅니다. “중청 예약했는데, 여기서 묵을 수는 없나요?” “ 그렇게는 안 되고요, 제가 중청에 연락해 놓겠습니다. 늦으신다고” “예……(연락은 나도 할 수 있다고요) 어떻게 안 될까요?” “예, 저희도 규정이라서… 2시간이면 충분히 중청갑니다.” “예, 예 (암요 암요…)”갑자기 투지가 생깁니다. 승부욕인지 오기인지가 발동, 희운각 앞 계단을 보란 듯이 오릅니다. 힘차게힘차게… 올랐더니 역시나 허벅지에 경련이 입니다. 부들부들. 이젠 장딴지까지 납으로 변한 것만 같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 오고, 바람은 세찹니다. 저쪽에선 구름이 몰려오고 아니 운해군요. 구름바다에 설악이 잠겨 봉우리마다 섬이 되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납덩이 다리를 털어주며 이 기막힌 경관을 음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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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청봉에 오르니 깜깜한 밤하늘에 조각달이 깜찍하게 박혀있습니다. 백담사 쪽 길에서 헤드랜턴 빛이 다가오는 걸 보니 살짝 위로도 되고. 중청대피소 0.6Km 이정표를 따라 어둠 속을 걷습니다. 오랜만의 야간 트래킹입니다. 스무 살 겨울,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했습니다. 처음이었죠. 힘들었고 좋았습니다. 문제는 저만 유독 힘들었다는 것. 아직 치기 어렸던 저희들은 은근히 경쟁적으로 걸었고, 그 바람에 저는 첫날부터 심하게 낙오, 날이 갈수록 지치면서 점점 더 쳐지게 됐습니다. 세석으로 가던 셋째 날,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길을 혼자 걷는데 또 왜 그렇게 무섭던지요. 저 어둠 속에서 멧돼지라도 뛰쳐나올 것 같아서, 이러다 탈진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길 잘못 들면 얼어 죽는다 싶어서. 그래도 남은 힘 그러모아 또 한 봉우리 오르고서 “야호” 외쳤더니 아무런 대답도 없고… 안 되겠다, 뭐라도 먹어서 에너지를 얻어야겠다는 절박함으로 배낭을 열었더니, 맙소사! 침낭만 2개에 버너 등등 못 먹을 거만 잔뜩 들었습니다. 힘들어하는 절 위해 아침에 친구들이 짐을 다시 분배한 거죠. 딱 하나 찾아낸 게 양배추 한 덩이-온전히 동그란. 그 달밤에 이빨도 잘 안 들어가는 양배추 덩이를 갉아먹으며 걸었답니다. 순수하고 진지해서 아름다웠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19:00 중청 산장에 도착합니다. 이미 깜깜해진지 오래, 대부분 저녁을 마치고 쉬고 있네요. 버너를 챙겨 취사장으로 가니(야외 테이블은 바람이 드셉니다) 여긴 아직 왁자글합니다. 밥 짓는 훈훈한 김이 반갑습니다. 이번 등산은 혼자라서 최대한 단촐하게 챙겼습니다. 햇반에 3분 짜장, 오뚜기 사골우거지국이 오늘 저녁 메뉴. 버너에 물을 끓이면서 아사히 맥주 1캔 땁니다. 고군분투의 하루를 보낸 나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밖으로 나와 보니 별은 고사하고 제 손도 안보일 지경입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아쉽지만 새벽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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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도 허탕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는 마음으로 오른 대청봉. 희부연한 안갯속에서 (일출 없는) 새날이 밝아옵니다. 듬직한 대청봉 비석 옆에서 사진 한 장 찍고 하산합니다. 중청으로 돌아가 누룽지 끓여 먹고는 백담사로 내려섭니다. 50분 만에 봉정암에 도착하니 안개가 둘러싼 경내가 상쾌합니다. 여기서 팁 하나. 봉정암에서는 아침(점심) 공양을 드실 수 있습니다. 공양 시간에 조금 늦으시더라도 보온통 속에 따끈한 국과 밥이 있답니다(시주는 알아서 정성껏 하시고). 봉정암에서는 바로 내려가시지 마시고 위쪽 사리탑을 꼭 올라보시기 바랍니다. 고요한 오솔길을 따라 조금만 걷다 보면 기가 막힌 포인트에 사리탑이 서 있습니다. 오랜 시간의 부침을 온몸으로 받아내다 보니 어느새 바위와 하나가 되고 자연의 일부가 된 모습. 저 작은 덩치로 봉정암의 으리으리한 거각들을 무심하게 내려 보고 있습니다. 마치 봉정암의, 아니 불교의 정신이 오롯이 현현한 듯합니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대자연에 불경죄를 짓는 듯해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스러지는 안개 위로 깨어나는 설악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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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되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목표를 이룬 그 순간은 행복하겠지만 그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까요. 또 그 이후의 인생은 어떡하나요.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다시 달리나요? 그리고 또 다른 목표? 또 다른 목표? 그러면서 우리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참고 감내하며 당분간의 행복은 유보합니다. 행복은 어느 한 지점에서가 아니라 그곳까지 가는 동안 느끼는 감정이어야 합니다. 행복은 뭔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의 과정에서, 소소한 일상에서, 오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든 산행 중에도 찬란하게 모습을 드러낸 설악의 운해에서, 캄캄한 어둠 속 빛나던 초승달에서 충만한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돌아갈 일상에서, 또다시 부대끼며 살다 지칠 때면 떠올릴 소중한 장면들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면서 백담사를 향합니다.


<산행 Summery>
1. 설악동 – 백담사 등산코스
– 1일 : 소공원 – 비선대 – 희운각 – 대청봉 (11Km, 6시간 30분)
-2일 : 대청봉 – 소청 – 봉정암 – 수렴동 산장 – 영시암 – 백담사 (12.9Km, 6시간)

2. 대피소 숙박
– 설악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예약 (예약오픈 1일(당월 16~말일), 15일(익월 1일~15일))
– 예약 만료 시에도 대기 예약 가능 (예약 취소 시 SMS로 예약전환 통보)

3. 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속초행 버스가 06:05부터 30분 간격 운행. (2시간 20분 소요, 17,300원)
– 속초터미널 – 설악동 : 시내버스 7, 7-1 (30분 소요)
– 백담사 입구 – 용대리 : 백담사 셔틀버스 (15분, 2300원, 겨울에는 운행 중지)
– 용대리 – 동서울 : 15:00, 16:20, 17:40, 18:20, 19:25 (2시간 20분, 15,900원)
백담입구터미널 ☎ (033) 462-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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