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 岳 (설악) – 1박 2일 설악산 산행기

雪 岳 (설악) – 1박 2일 설악산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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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령



아침 6시에 집을 나섭니다. 평소보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눈도 잘 안 떠지지만 동서울발 7:30 버스를 타려면 지금 나서야 합니다. 모자란 아침잠은 버스에서 보충할 수 있습니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부딪쳐오는 한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보로는 설악산 영하 16도. 자못 비장한 각오까지 다지며 1박 2일 산행을 떠납니다. 오랜만에 떠나는 숙박산행이고, 이제는 마흔이라는 생각에 가슴 한편 걱정도 스미지만, ‘아직 마흔이잖아’ 라고 곱씹으며 힘차게 발을 내디뎌봅니다.

뻐근한 목을 가누며 실눈을 뜨니 버스는 이미 하얀 눈 세상을 달리고 있습니다. 눈부십니다. 말 그대로 눈이 부셔 목에 걸친 선글라스를 올려 씁니다. 2시간 20분 만에 한계령 휴게소에 다다릅니다. 따로 정류장은 없습니다. 눈바람만 질주하는 고갯마루에 서니 정말 설악산에 왔구나 싶습니다. 설렘과 기대, 걱정, 각오 등이 마구 뒤섞입니다. 이런 기분도 오랜만입니다. 찻길과 광활한 주차장 – 이 겨울 누가 한계령으로 차 몰고 오겠습니까 – 을 가로질러 휴게소로 들어갑니다. 오늘의 베이스캠프입니다. 먼저 뜨끈한 오뎅탕을 주문합니다. 다시 저 바람 속으로 나서려면 오뎅탕의 열기가 필요합니다. 선크림도 다시 바르고, 배낭끈도 점검합니다. 두꺼운 창 너머로 설경이 기가 막힙니다. 슬슬 몸속으로 따뜻한 기운이 번지는 게 출발할 때가 된 듯합니다. 휴게소 우측의 가파른 계단 길을 보며 아이젠을 꺼내 신습니다.

   
▲ 물 한 모금
   
▲ 조릿대





역시 힘듭니다. 아직 대청봉까지 6.9km 남았습니다. 멈춰 서서 물 한 모금 먹습니다. 눈밭 속에서 조릿대가 새초롬히 파란 잎을 내고 있습니다. 아, 이게 생명입니다. 조릿대가 저를 보고 “너도 힘내” 하고 말하는 듯합니다. 늠름한 잣나무, 너덜너덜 이쁜 물박달나무 사잇길로 계속 오릅니다. 저 위에 능선이 보이는 것 같은데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산에서는 늘 희망이 앞서서, 바로 앞이 목적지 같았는데 올라서면 아직 멀리 있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기대를 안 합니다. 걷다 보면 생각이 없어집니다. 힘들어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한 발 한 발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거지요. 제가 산을 좋아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걱정거리, 고민거리를 잔뜩 안고 산에 오더라도 걷는 동안은 아무 생각 안 납니다. 물론 산에서 내려오면 다시 머리가 아플 테지만, 그 고민의 질과 양은 산에 오르기 전과는 분명 다릅니다. 아무 생각도 안했지만, 분명 다릅니다. 마치 컴퓨터가 작업량이 많아 버벅대면 리셋이 필요하듯, 고민이 많아서 머리가 버벅댈 때는 뇌의 휴식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

능선이 맞나 봅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삼엄한 바람소리가 머리 위 공기를 울립니다. 태풍이 부는 거 같습니다. 능선 못 미쳐 오목한 양지에 잠시 앉습니다. 저 위는 쉬는 건 고사하고 똑바로 걷기도 힘들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김밥과 컵라면, 보온병을 꺼냅니다. 국립공원에서는 대피소 외에 취사가 금지되므로 보온병을 준비했습니다. 취사금지가 아니더라도 겨울산행에선 보온병이 필수입니다. 잠시 쉴 때 따뜻한 차 한 잔은 얼마나 소중한지요. 곁님은 입맛이 없나 봅니다. 김밥도, 라면도 거의 남겼습니다. 잔반처리도 겸해 제가 다 먹습니다.

   
▲ 간단한 점심

드디어 능선에 올라섰습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동해입니다. 날아갈 듯합니다. 몸도 마음도. 몸은 문자 그대로 날아갈 듯 휘청거리고, 마음은 뭔가 감개무량한 것이 차올라 한껏 날아오를 것 같습니다. 하늘이 정말 푸릅니다. 왼편으로는 귀때기청봉이 우뚝합니다. 그리고 굽이굽이 이 땅의 산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360도 파노라마입니다. 아름답습니다. 이 순간입니다. 제가 등산하는 이유입니다.

   
▲ 능선
   
▲ 오징어바위
   
▲ 이정표
   
 
   
 
   
 

짧은 다리를 지나고, 가파른 철제 계단도 타고 오릅니다. 사다리계단 또는 계단사다리라고 하는 게 적확할 듯합니다. 정면에 오징어 바위입니다. 마침 뒤에 오던 팀에게 추월당합니다. 그분들이 지나가면서 대화합니다. “저게 갓 바위야” 상관없습니다. 저한테는 오징어 바위입니다. 사물에 나만의 이름을 지어 붙이면 더 애틋해집니다. 제 나름의 소소한 여행 tip입니다. 강원도 하조대에 가면 곁님 아이디를 따서 이름 붙인 ‘크리스털 비치’가 있습니다. 주목이 장쾌하게 서 있습니다. ‘붉을 주’,‘나무 목’ 주목입니다. 붉은 기운이 눈과 대비되어 정말 씩씩합니다. 주목은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오래 살고 고사목이 되어서도 힘없이 쓰러지지 않는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이보다 더한 녀석이 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그런 나무인데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쓰러져 천 년’ 이랍니다. 중동은 건조한 사막지대라서 쓰러져도 천 년 동안 안 썩는다는 겁니다. TV를 보면서 얼마나 웃었던지요. 우리와 비슷한 해학성에 왠지 레바논이 남 같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 주목
   
▲ 내사랑
   
▲ 대청

멀리 중청봉이 보입니다. 대청은 그 너머에 있겠지요. 허벅지에도 눈이 달린 듯 정상이 보이자 절로 힘이 들어갑니다. 앞에 가는 곁님도 오르락내리락 사뿐사뿐 걸어갑니다. 능선길이라 평탄하고, 바람도 산봉우리가 막아줘서 걷기 좋습니다. 곁님이 멈춰 섭니다. “왜”라고 물어보려는데 곁님 발 언저리에서 동고비가 한 마리 휘릭 날아오르네요. 멀리 가지 않고 저만치에 앉습니다. 귀엽습니다. 그런데 요놈 조금 이상합니다. 유난히 배가 통통합니다. 이 계절에는 먹을 게 없어서 외려 홀쭉하게 말라야 될 텐데 말입니다. 아직 날아가지 않고 저만치서 까딱까딱 꼬리를 치고 있습니다. 아하! 싶습니다. 배낭 속 땅콩을 꺼내려는 찰나 날아가 버립니다. 통통함의 비결은 저 붙임성인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용감했으면 기어이 땅콩을 얻어먹었을 것을. 제가 다 아쉽습니다. 이런 때를 위해 배낭에 땅콩이나 빵부스러기를 넣어옵니다. 또 기회가 있겠지요.

밑으로 용아장성이 병풍처럼 펼쳐집니다. 용 이빨이 장성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붉게 물들어 있어 무섭기까지 합니다. 아직 석양이 지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산이라 벌써 어둑신합니다. 구름도 많아졌습니다. 중청봉의 레이더돔을 보며 옆으로 우회합니다. 서슬 퍼런 대청봉 밑에 중청대피소가 납작 엎드려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포근합니다. 대청은 안 오릅니다. 언제부턴가 정상을 가지 않습니다. 한번 올라보기도 했거니와 꼭 올라서야 맛이 아님을 알았다고 할까요? 어떤 것은 지그시 바라볼 때 더 멋있고 맛있습니다. 힘들어서 안 오르는 이유도 조금은(?) 있습니다. 대피소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커피로 잠시 달래봅니다.

30분을 더 걸어 소청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쉽니다. 숙박 등록을 하고 담요 2장, 식수 2PET병도 구매합니다. 담요는 바닥요 용도고 침낭은 가져왔습니다. 숙소는 마루 침상이라 배기기도 하고 차갑습니다. 출출합니다. 취사장에 들어서니 이미 밥 짓는 김이 가득합니다. 밥을 안치고 프라이팬에 삼겹살을 올립니다. 지글지글 노릇노릇 기가 막힙니다. 이 순간입니다. 제가 숙박산행을 하는 이유입니다. 기름이 튀면서 고어텍스에 얼룩이 생깁니다. 점퍼를 벗어 뒤집어 입습니다. 나름 tip입니다. 허겁지겁 먹습니다. 맛있습니다. 마침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둘이 취사장으로 들어옵니다. 입성이 영락없는 아마추어입니다. 등산화만 겨우 갖춰 신었습니다. 배낭에서 부스터가 나옵니다. 또 다른 배낭에선 노란 냄비가 나옵니다. 왠지 이 친구들 짠합니다. 20년 전 제 모습입니다. 대학 1년, 친구들과 지리산 갔을 때가 오버랩됩니다. 다들 같은 마음인지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줍니다. 고기에, 국물에, 소주에.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는데 그 모습이 밉지 않습니다. 따뜻한 밤입니다.

   
▲ 소청대피소
   
▲ 취사장
   
 

많이 먹었습니다. 누울 때 이미 뭔가 더부룩했습니다. 밤 11시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옵니다. 12시에 다시 화장실에 갑니다. 설사입니다. 새벽 1시 반에 다시 화장실에 갑니다. 헉! 이 시간에 화장실에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놀랍니다. 힘들게 참으며 기다립니다. 문득 하늘을 보니 별이 많습니다. 은하수가 뿌옇게 보입니다. 눈앞에서 별이 보일 지경까지 참은 후에 화장실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속까지 울렁거려 결국 토해 냅니다. 오히려 시원합니다. 잘 수 있을 듯합니다. 긴 밤입니다.

역시 꼭두새벽부터 부산스럽습니다. 달그락 철그덕 짐 싸는 소리에 어렵게 든 잠에서 깹니다. 대청봉 일출팀들입니다. 5시쯤 됐을 겁니다. 우리는 안갑니다. 다시 잠 속으로 파고들기 위해 침낭을 뒤집어씁니다. 2시간 정도 더 잔 듯합니다. 아침잠이 참 달았습니다. 일어나서 가만 얼굴을 보니 해쓱합니다. 산에 와서 배탈 나 보기는 처음입니다. 내려갈 일이 까마득한데, 어쩌겠습니까? 또 먹고, 다시 걸어야지요. 누룽지를 끓입니다. 산에 다녀보니, 아침에는 누룽지가 최고더군요. 간단하고, 부담 없고, 영양가 높고. 곁님은 어제 남은 삼겹살을 굽습니다. 아침 삼겹살! 산에 오면 일반인도 강호동이 됩니다. 저는 속이 안 좋아 누룽지만 조금 뜹니다.

오늘은 봉정암을 거쳐 백담계곡으로 하산합니다. 총 11km 정도입니다. 봉정암 위로 불끈 솟은 암벽들의 기상이 정말 볼 만합니다. 겨울의 산사는 시래기가 주인입니다. 절을 빙 둘러 시래기가 빨래처럼 널려 있습니다. 백담사 10.1km 이정표가 나옵니다. ‘아, 한참 전에 백담사 10.4km를 지나온 거 같은데……’ 잔인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0.2km만 더 간 지점에 이정표를 세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차이는 0.2km에 불과하지만, 10.1km 남은 것과 9.9km 남은 것은 그 받아들임의 차이가 하늘과 땅입니다. 몸이 안 좋으니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쌍폭입니다.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얼어붙었습니다. 급경사였던 길은 이제 완만하게 굽이치며 계곡을 옆에 끼고 이어집니다. 장난치듯 계곡을 계속 가로지르며 걸쳐있는 철교를 건너다가 박새를 만납니다. 주머니에 넣어 둔 빵 부스러기를 꺼내 다리 난간에 뿌려주고 멀찍이 떨어져 기다려 봅니다. 역시 동고비가 제일 용감합니다. 박새도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합류합니다. 그러다 동고비랑 티격태격하기도 합니다. 계곡에 새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집니다.

11시 40분, 수렴동 대피소에 도착합니다. 아직 갈 길이 2시간 정도 남았는데도 다 내려온 기분입니다. 이후로는 길이 좋아 부지런히 발만 놀리면 됩니다. 마음마저 털썩 풀어놓고 라면을 끓입니다. 곁님은 또 삼겹살을 굽습니다. 제가 들고 왔지만 참 많이도 준비했습니다. 뒤따라 도착한 분들도 활기차게 식사준비를 시작합니다. 와우, 저분들은 커피 그라인더도 들고 왔네요. 어딜 가나 고수들은 넘쳐납니다. 오늘 아침 대청봉 체감온도가 -45도였답니다. 안 올라가길 백번 잘했습니다. 다시 힘을 내 배낭을 짊어집니다.

   
▲ 봉정암
   
▲ 시래기
   
▲ 수렴동대피소
   
▲ 하산
   
▲ 기원
   
▲ 백담계곡





백담사에서 용대리 버스정류장까지는 셔틀이 다닙니다. 하절기에만. 택시를 불러보지만 여기는 못 온다고 합니다. 6km 포장도로를 걸어갑니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이 태워줄 법도 하건만 그냥 지나치네요. 다리는 이제 거의 기계적으로 반복 운동을 할 뿐 피곤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1시간 반을 걸어 용대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합니다. 따뜻합니다. 무쇠난로를 둘러싸고 앉은 낯익은 등산객들이 고생했다 맞아줍니다. 맥주 파티가 한창입니다. 저는 따뜻한 사케 한 잔을 그려봅니다. 추울 때면 늘 사케가 생각납니다. 2004년에 우리들의 언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던 그 사케.

제일 힘든 산행이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오나 봐라”고 속으로 외치며 내려왔지만 아무 쓸데 없는 말임을 압니다. 술 먹은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며 다들 한 번씩 내뱉어봤을 “내 다시는 술 먹나 봐라”와 같은 말임을. 힘든 산행은 힘든 대로 또 하나의 추억이 될 것임을 압니다. 우리 인생도 결국 ‘추억만들기’입니다. 아름다웠든, 힘들었든 그 모든 추억이 우리를 만듭니다. 100년을 살았어도 추억할 거리 하나 없는 매일 쳇바퀴 도는 일상이었다면 눈감을 때 100년은 단 하루로만 기억될 것입니다. 추억의 양만큼 인생은 길고 풍요로워집니다. 어느새 다음 산행코스를 짜고 있는 저 자신을 문득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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