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속았냐”는 2차 가해다: 부모를 속인 건 AI 시스템이다

“왜 속았냐”는 2차 가해다: 부모를 속인 건 AI 시스템이다

[최홍규 칼럼: 당신의 부모는 AI 세상에 안녕하십니까? 5회]

“왜 속았냐”는 2차 가해다: 부모를 속인 건 AI 시스템이다

그 말이 두 번 죽인다
부모님이 사기를 당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우리는 어떤 말을 했는가.

“그걸 왜 믿었어?”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것에 속아?” 다그치려던 게 아니었을 것이다. 걱정이 앞섰고, 당혹감이 목소리를 굳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부모님의 귀에 전혀 다른 문장으로 들린다. 당신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 이미 한 번 당한 사람에게, 그 말은 두 번째 공격이다.

사기의 첫 번째 피해는 돈이다. 두 번째 피해는 사람이 준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수치심이 신고를 막는다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등이 포함된 연구팀이 2024년 10월 발표한 연구 «노인의 사이버범죄 신고를 막는 요인 탐색(Exploring the Factors Preventing Older Adults From Reporting Cybercrime and Seeking Help)»은 침묵하는 피해자들을 직접 만났다. (discovery.ucl.ac.uk/id/eprint/10198960/1/Health%20%20%20Social%20Care%20in%20the%20Community%20-%202024%20-%20Havers%20-%20Exploring%20the%20Factors%20Preventing%20Older%20Adults%20From%20Reporting.pdf)
사이버범죄를 경험한 60세 이상 피해자 16명, 가족 2명, 전문 종사자 15명 등 총 33명을 인터뷰한 결과, 피해자들이 신고하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수치심이었다.

62세 피해자 재스(Jas)의 말이다. “정말 설득력이 있었어요. 수치심 때문에 거의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 했어요. 2만 파운드를 잃고, 그렇게 속아 넘어간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거든요.” 73세 피해자 리베카(Rebekah)는 지인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설마 당신이요? 아직 80도 안 됐잖아요!” 연구팀은 이런 반응을, 나이가 들면 기술에 약하고 그래서 속는다는 연령·기술 편견의 사례로 보고 ‘디지털 연령주의(digital ageism)’ 개념으로 해석했다.

수치심은 단지 감정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신고되지 않은 피해 정보는 범죄 조직으로 다시 흘러들어간다. 한 번 속은 사람은 ‘쉬운 표적’으로 분류되어 다음 사기의 1순위가 된다. 또한, 연구에서는 60세 이상이 젊은 층보다 사이버범죄를 덜 신고하지만, 한 번 피해를 입은 뒤에는 반복 피해와 금전적 손실을 겪을 위험이 더 크다고 지적한다. 가장 적게 신고하는 집단이 가장 자주 다시 당하는 집단이다. 침묵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 피해의 문을 열어둔다.


교수도 당했다, 문제는 지능이 아니다

미국의 버지니아 공과대학교(Virginia Tech) 연구팀이 2025년 6월에 발표한 논문 «사기당한 자들의 지혜(The Wisdom of the Scammed)»는 정면으로 묻는다. 피해자들은 정말 몰라서 당했는가. (link.springer.com/content/pdf/10.1057/s41284-025-00487-z.pdf)

연구팀은 60세 이상 사기 피해자 19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참여자 대다수는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지녔고, 스스로 매긴 컴퓨터 능숙도 평균은 5점 만점에 3.73점이었다. 한 참여자는 컴퓨터 보안 수업을 직접 강의했던 전직 교수였다. 그럼에도 모두 당했다. 연구팀의 결론은 명확하다. 피해의 원인은 피해자의 무지가 아니라, 사기 수법 자체의 정교함이다.

범죄자들은 피해자의 인적 사항을 사전에 수집했고, 신뢰 관계를 정밀하게 흉내 냈으며, 실제 은행이나 가족의 목소리처럼 들리도록 배경 소음까지 재현했다.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기술이 아니다. 사람의 신뢰 구조 자체를 해킹하는 시스템이다.


AI는 인간의 빈틈을 학습한다

과거의 사기는 불특정 다수에게 같은 문자를 뿌리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어설펐고, 그래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오늘날 사기에 동원되는 AI는 목소리를 복제하고, 얼굴을 합성하고, 문체를 모방한다. 이론상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한 AI는 피해자가 어떤 말에 흔들리는지, 어느 시간대에 전화를 받는지, 어떤 관계의 이름이 언급될 때 판단이 느려지는지를 분석해 최적의 시나리오를 구성할 수 있다. 보이스피싱에 쓰이는 AI 음성 합성, 딥페이크 영상 통화, 생성형 AI가 작성한 맞춤형 문자까지. 범죄자는 이 도구들을 조합해 피해자의 심리적 방어선이 가장 얇아지는 순간을 정확히 겨냥한다.

이것은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니다. 인간 대 AI 시스템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개인의 조심성만으로 버텨내기를 기대하는 것은, 맨손으로 기계를 막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속인 건 판단력이 아니라, 설계된 함정이다

서울 마포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의 이성훈 경사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분들이 본인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누구나 그 순간에는 속을 수 있다고 말씀드리려 합니다. 피해자에게 ‘왜 그렇게 하셨느냐’는 말은 가장 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www.fnnews.com/news/202605211823501436)

사기 피해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수사관의 말이다. 피해자는 이미 충분히 자책하고 있다. 가족의 질책은 그 위에 두 번째 상처를 얹는 일이다.

다시 한번, 연구들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가족이 비난 없이 들어주고 실질적으로 도와줬을 때, 피해자의 심리적 회복이 훨씬 빨랐다. 반대로 가족의 실망을 걱정하며 혼자 삭인 사람들은 반복 피해에 더 취약해졌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회복의 속도를 바꾸고, 다음 피해 여부를 가른다는 것이다.

또 다른 구조적 문제들도 생각해 봐야 한다. 사이버범죄 피해를 신고하려 해도, 노인에게는 그 경로가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접근하기 어려웠다. 경찰에 신고해도 담당 부서가 모호해 여러 기관을 전전하다 지쳐 포기하는 사례가 많았고, 은행에 문의해도 이미 이체된 돈은 돌려받기 어렵다는 답만 돌아왔다. 도움을 받으려 해도 실질적인 출구가 막혀 있는 구조, 이러한 것들이 AI 시대에는 사기 피해자를 두 번 쓰러뜨리는 또 다른 함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구조가 막아야 한다

개인의 경계심으로는 한계가 있다. 버지니아 공과대학교 연구팀이 강조하는 것도 그 지점이다. 피해 예방은 개인 교육에만 기댈 수 없다. 가족·지역사회·기관이 함께 연결된 방어 생태계가 필요하다. 이상한 연락이 왔을 때 자연스럽게 “잠깐만요”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 의심스러운 이체가 감지될 때 자동으로 속도를 늦추는 금융 시스템, 피해를 털어놨을 때 비난 대신 도움으로 이어지는 신고 경로. 이 세 가지가 갖춰진 환경에서 피해는 줄어든다.

이 칼럼에서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부모님의 금융 앱을 함께 열어 하루 이체 한도를 낮게 설정해두는 것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하게 설득에 성공해도, 한 번에 수백만 원을 보내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피해 규모는 줄어든다. 부모님의 판단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AI 시스템의 공격 앞에서는 어떤 판단력도 혼자 버텨내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 속았냐”를 “왜 이런 시스템이 가능했냐”로
우리가 피해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속았어?”는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린다. “왜 이런 AI 시스템이 가능했냐?”는 책임을 구조에 묻는다. 이 두 질문 사이에는 피해자의 존엄이 있다. 부모님이 속은 것은 나이 때문도, 무지 때문도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신뢰와 감정의 회로를 AI가 정밀하게 분석하고 공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부모님 곁에 설 수 있다.

사기꾼이 노린 것은 부모님의 어리석음이 아니었다. 가족을 믿고, 목소리를 믿고, 오랜 관계를 믿어온 평생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AI는 바로 그것을 학습한다. 누가 어떤 말에 흔들리는지, 어떤 이름 앞에서 판단이 멈추는지를 데이터로 읽고, 그 결을 따라 파고든다. 앞으로 이 AI 기술은 더 정교해질 것이고, 우리 부모님의 품성은 계속해서 그 표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부모님의 믿는 습관이 아니라, 그 믿음이 착취당하지 않도록 막는 구조다. “왜 속았냐”고 묻는 대신, “왜 이런 시스템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분노의 방향이 바뀔 때, 비로소 대응도 바뀐다.

 

본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해 제작됨
본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활용해 제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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