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규 칼럼: AI 시대의 콘텐츠 5회]
AI가 광장을 허무는 시대, 미디어는 광장을 더 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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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우리는 점점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같은 날 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누군가의 화면에는 A가 뜨고 다른 사람의 화면에는 B가 뜬다. 알고리즘이 오래전부터 해온 일이다. 그런데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이 분열이 훨씬 깊어지고 있다. 단순히 다른 뉴스를 보는 것이 아니다. 아예 다른 현실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개인화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광장이 사라진다
베이징대학교 국제법학원(Peking University School of Transnational Law)의 조교수이자, 예일대학교 로스쿨(Yale Law School) 방문 연구원 길라드 아비리(Gilad Abiri, 이하 아비리)는 2024년 하버드 로스쿨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생성형 AI, 디지털 미디어로 읽다(Generative AI as Digital Media)」 (arxiv.org/pdf/2503.06523)
에서 이 흐름을 정면으로 진단한다. 그는 소셜미디어와 검색 엔진, 그리고 생성형 AI를 하나의 흐름으로 본다. 셋 다 알고리즘으로 정보를 걸러내고, 소수의 거대 기업이 그 권력을 쥐고 있다. 그런데 이 흐름의 끝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전과는 다르다.
소셜미디어도 이용자마다 다른 콘텐츠를 보여주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백만 명이 같은 플랫폼 안에 함께 있는 구조였다. 생성형 AI는 그보다 훨씬 깊이 들어간다. 각 사용자가 자신만의 가치관, 취향, 신념에 맞춰 조율된 AI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세계에서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돌아오는 환경이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문제가 된다. 내 생각을 확인해주고, 내 의견에 동의해주고, 내가 보고 싶은 정보만 보여주는 AI. 그 안에 오래 머물수록 바깥의 다른 목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이것이 에코 챔버(echo chamber), 즉 내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방이다. 아비리의 말처럼, “공유된 사실과 공유된 경험 없이 시민들은 이성적인 민주주의적 토론과 집단적 의사 형성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MIT 테크놀로지 리뷰(MIT Technology Review)에 2026년 5월 게재된 「AI로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청사진(A Blueprint for Using AI to Strengthen Democracy)」 (www.technologyreview.com/2026/05/05/1136843/ai-democracy-blueprint)
은 이를 더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관점에 맞춰진 AI 에이전트를 가진 공론장은, 사실상 공론장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내부에서는 일관되지만,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공유된 숙의(deliberation)와 공존하기 어려운 사적 세계들의 집합일 뿐이다.”라고 말이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광장이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 부딪히는 곳이다. 그런데 모두가 각자의 AI와 단둘이 대화하는 세계에서는, 겉으로는 수백만 명이 광장에 모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수백만 개의 방에 각자 혼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방마다 벽이 있고, 그 벽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생각을 나누고 설득하고 때로는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작동한다. AI와 대화하는 시대에는 그 과정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인쇄술은 공통의 독자를 만들었다. 방송은 공통의 시청자를 만들었다. 개인화 AI는 각자의 독자, 각자의 시청자만 만든다. 모두가 함께 서 있던 광장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AI로 광장을 다시 세운 실험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연구가 눈길을 끈다.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와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 옥스퍼드대학교(University of Oxford) 공동 연구팀이 2024년 10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논문 「AI는 민주주의적 숙의에서 인간이 공통점을 찾도록 도울 수 있다(AI Can Help Humans Find Common Ground in Democratic Deliberation)」 (www.rivista.ai/wp-content/uploads/2024/10/science.adq2852.pdf)다. 연구팀은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이론에서 영감을 얻어 ‘하버마스 머신(Habermas Machine)’이라는 AI 조정자를 만들었다. 브렉시트(Brexit), 이민, 최저임금, 기후변화처럼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주제를 놓고 영국 시민 5,734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AI 조정자가 만들어낸 공통 의견은 인간 조정자의 것보다 56% 대 44%로 더 높은 지지를 받았다. 더 명확하고, 더 공정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AI 조정자를 거친 집단은 토론 전후를 비교했을 때 서로 간의 합의 정도가 평균 8%포인트 높아졌다. 반면 AI 없이 사람끼리만 의견을 나눈 집단에서는 이런 변화가 없었다.
이 실험이 보여주는 것은 ‘AI가 인간보다 낫다’는 게 아니다. AI는 사람들을 각자의 세계로 분리시키는 데 쓰일 수도 있고, 반대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설 수 있는 광장을 만드는 데 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AI가 광장을 허무는 도구가 되느냐, 광장을 짓는 도구가 되느냐는 그것을 어떤 의도로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미디어가 지어야 할 세 개의 광장
그렇다면 미디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생각보다 명확하다. 광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어야 한다.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 번째는 ‘공통 자료팩’이다. 입장이 달라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사실 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어느 쪽에 있든, 이 사실만큼은 같이 보자.’ 알고리즘이 각자에게 다른 정보를 밀어 넣는 시대에, 모두가 출발선에 함께 설 수 있도록 공통의 사실 기반을 제공하는 것은 미디어가 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광장의 바닥을 까는 일이다.
두 번째는 ‘이견 대화 중계’다. 양측 의견을 나란히 보여주는 균형 보도와는 다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대화하면서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콘텐츠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하버마스 머신 실험이 보여주었듯, AI는 이 과정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단, AI가 조정을 맡더라도 대화의 인간적인 온도는 미디어가 지켜야 한다.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접점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들으면서 만들어낸 접점을 화면에 담아야 한다. 광장에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세 번째는 ‘공론 아카이브’다. 어떤 사안을 두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의견들이 오고 갔는지, 무엇이 합의되고 무엇이 여전히 부딪히는지를 기록하고 공개하는 것이다. 공론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어제의 대화가 오늘의 출발점이 되고, 오늘의 논쟁이 내일의 참조점이 될 때, 광장은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광장에 기억을 새기는 일이다.
세 가지 모두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못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광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AI 시대의 가장 큰 위협으로 흔히 가짜 정보를 꼽는다. 그러나 더 깊은 위험은 따로 있다. 각자 옳다고 믿는 정보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정보들이 서로 만날 공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공통의 사실도, 공통의 경험도, 공통의 대화도 없어지는 것. 그것이 개인화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생기는 가장 조용하고 가장 깊은 균열이다.
미디어가 그 균열을 방치하는 순간, 미디어는 수백만 개의 맞춤형 우주 속에서 수백만 개의 거울 중 하나로 전락한다. 각자에게 각자의 현실만 보여주는 AI 기계들 사이에서, 우리가 아직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해주는 목소리. 그것이 지금 미디어에 남은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인간적인 일이다.
광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 지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미디어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