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미래(The Future of the Humanities)를 읽고

인문학의 미래(The Future of the Humanities)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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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환 CBS 디지털기술국 부장

표지 02
호박에 줄긋기 – 삶의 실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니?”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이 말은 본질은 모른 채 겉모양만을 흉내 내는 얄팍한 술수를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수박 겉핥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 성경의 회칠한 무덤’ 등이 있겠지요. “세상은 가까운 데서 보면 비극이지만 먼 데서 보면 코미디다.”라고 찰리 채플린은 말합니다. 지혜의 왕으로 알려진 솔로몬은 전도서의 서두에서 삶이 헛됨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은 속된말로 삽질(?)을 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히틀러는 독일국민에게 경제적 풍요와 민족적 자부심을 주며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지금 자신의 잘못을 역사에 새기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대신 바나바를 압도적으로 선택했지만 그에게서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구소련)와 중국, 한국 등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한 대량 학살이 있었지만 그런 사회가치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수는 급격히 줄었습니다.

인터넷과 SNS로 대변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사람들은 연결을 넘어 초연결의 시대를 말합니다. 하지만 막상 만남이나 식사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휴대폰 만지기에 열중하며 단절됩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는 자녀들에게 IT기기를 통제하고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는 휴대폰을 끄고 상대의 눈을 보며 대화하라고 합니다. 많은 한국의 엄마들은 자녀들에게 자유를 빼앗고 패턴화된 기계적 지식을 먹이며 끊임없이 불안을 주입시키는 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국민투표, 삼권분립, 다수결의 원칙이 과연 민주주의의 본질일까?’
‘창발성, 창의성 등 기발한 생각이 과연 창조경제의 힘일까?’
‘복지사회가 과연 분배라는 과제로 현실화될 수 있나?’
‘유럽이 추구한 사회가 먹고사는데 걱정 없는 사회였나?’
‘문화적 패권이 만능인가?’
‘산티아고 가는 길은 내적 성찰의 과정인데, 이를 베낀 제주 올레는 성찰의 길인가 산수 관광코스인가?’
‘서구교육(education)은 뽑아내기인데 왜 한국교육은 쑤셔 넣기인가?’
‘school은 어원적으로 여유, 휴식이라는 뜻인데 한국에서는 초등생들조차 여유가 있는가?’
‘University에서 한국대학들은 unity의 의미를 알고 있나?’

나열한 질문들은 사실 아주 익숙한 것들이지만 우주의 블랙물질과 같은 이면적 가치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100여 년 동안 서구사회라는 수박을 맛보지 않고 자신의 호박에 줄을 그어온 인식의 한계라고 봅니다.

지도와 나침반 – 전체를 모르면 하나도 모르는 것
그러면 이런 삽질(?)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탐구하고 반추하여 앎의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상적 경험을 제외한 앎을 획득하는 통로를 주로 4가지로 봅니다. 책, 대화, 여행, 박물관입니다. 그중에서도 책이 중요한 것은 나머지 세 가지를 포괄하거나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세상 모든 가치에 접근이 가능합니다. 또한 문자라는 상징체계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함축할 수 있는 능력이 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실제 책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말은 실제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지 못합니다. ‘바쁘다’, ‘시간이 없다’라고 하지만 바빠서 굶어 죽은 사람이 없듯이 실제는 책이 고프지(?) 않은 것입니다. 배부른 이에게 만찬이 의미가 없고 배고픈 사람은 먹는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막연한 의무감이나 교양인에 대한 선망 등은 독서의 동기가 되지 못합니다. 자신의 가치세계가 공복 상태임을 실감할 때 책은 우리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인문학의 미래’는 우리에게 공복과 영양결핍을 인식하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우물 안 개구리’, ‘쳇바퀴 속의 다람쥐’, ‘껍질 속의 존재’ 등으로 자기한계에 갇힌 사람을 표현합니다. 그들은 하늘의 지름은 1m이고, 일은 단순반복이며,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외의 시공간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사람들, 특히 한국적(?) 교육을 받아 온 이들에게 자기 확장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눈을 크게 떠라’, ‘산 위에 올라가서 세상을 보라’라고 말할 때 추천할 수 있는 책입니다. 지도와 나침반을 지향한 책입니다. 성서에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땅을 기는 뱀은 파편적인 가치에 능하지만 비둘기처럼 전체를 온전히 보는 능력(순결)은 없습니다. 큰 홍수 후에 노아가 방주의 비둘기를 날려서 땅에서의 생존여부를 확인하는 이유입니다. 뱀은 땅을 기어 다니지만 지도를 만들 수 있는 능력도 관심도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서구사회는 철학이 학문의 본질로 되어있고 대학교가 University 즉 Unity in Diversity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학문은 하나로 연결된 지도 만들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가치를 잘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책 속으로
요즘 한국 대학은 구조조정에 인문학과들이 뒷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프린스턴대학에서 33년간 철학을 강의한 저자 윌터 카우프만(1980년 사망)이 이전부터 미국대학에 나타난 비인문학적 현상을 비판하면서 1977년에 발간한 것입니다. 실용학문중심, 지식인의 실종, 기업형 대학 등 30여 년이 흐른 이제 한국의 상황에 적합한 책이 되었습니다. 유작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의 지식의 핵심들을 모두 드러내 놓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한 줄, 한 마디가 가슴으로 다가오는 지식적 자극입니다. 특히 평소에 독서를 풍부하게 해왔지만 정리할 기회가 없었던 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한 깊은 지식의 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지평의 확장이 될 수 있고 자만하지 않는 지식적 세계관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축소하면 다음과 같이 3개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지식자의 네 가지 유형
‣ 책-독서방법, 서평, 번역
‣ 교육-고등교육, 종교, 비전, 학제 간 연구

각 장에서는 새로운 영감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기존에 우리가 가졌던 가치를 뒤집어엎기도 합니다. 통찰가(visionaries) 유형과 사변가(scholastics) 유형에서 통찰가들은 자기 시대의 일반적 상식과 단절되며 언어의 부족을 느끼고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를 겪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대부분의 대학교수들을 포함하는 사변가 유형은 자신의 경직됨과 전문성에 자부심이 있고 자기 분야의 공통의 공론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통찰자를 적대시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주도된 인문학의 전문화가 얼마나 우리를 근시안적이고 맹목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도 말합니다. 또한 소크라테스형의 비평가와 저널리스트형의 비평가를 제시합니다. 저자는 저널리스트들에 대해 아주 혹평을 하는데 니체 등의 여러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거의 쓰레기(?) 취급합니다. “즉각적인 소비를 위해 글을 쓴다.”, “시대의 노예다.”, “그들이 가진 동기가 사람을 타락시킨다.”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위협이다.” 등입니다. 저널리스트가 쓴 글을 일상적으로 먹는 대다수 일반인들은 쓰레기를 먹고 산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두 번째, 독서에 관해서는 책에 접근하는 여러 방식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몇 문장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만을 문제 삼고, 저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관점, 선입견을 위태롭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다양한 저자들의 책을 읽는 것은 다양한 장소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 “파벌주의와 문화적 조건에서 해방될 때 의식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

세 번째, 교육과 지식분야에서 저자가 가장 강조한 부분이자 필자가 의외로 생각했던 것은 종교의 중요성입니다. ‘창세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는 그의 표현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비교 종교학보다 중요한 과목은 없을 것이다”, “신념과 윤리가 가장 탁월하게 만나는 곳이 바로 종교이다”, “근대과학이 서구에서 발전하기는 했지만 많은 점에서 창세기보다는 다양한 세계들에 관한 불교적인 성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종교는 별개의 학문이 아니며, 문학이나 예술, 음악, 철학, 역사를 다루는 다른 전공과목 들과 함께 연구해야 한다.” 그 외에 추가적으로 지식에 관한 그의 표현을 적어봅니다. “사변가의 만병통치약은 바로 고도의 전문화이다. 다량으로 섭취하면 , 이 약물은 바로 눈을 멀게 만드는 메틸알코올과 동일한 효과가 있다.”, “결국,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가르쳐야 한다.”, “학문에서는 일부일처제가 미덕이 아니다.”

올드보이(old boy)를 넘어서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는 우물이나 껍질 속과 같은 닫힌 공간에서 15년을 지냅니다. 짜장면 추가하면 서비스(?)로 오는 저급한 영양의 군만두로 하루하루를 연명합니다. 그리고 힘의 복수를 연습함으로써 그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쳇바퀴처럼 반복됩니다. 그다음엔 새로운 DNA가 아닌 유사 가치에 친숙한 근친상간이 벌어집니다. 그의 이름(오늘도 대충 수습하며 살자)처럼 말입니다.

아이폰의 등장 이후로 기업이나 기술에도 인문학이 들어왔습니다. 최근 최소 수백 명을 희생시킨 옥시 사태나 최대 수천조 원을 배상할 수도 있는 폭스바겐 사건의 경우만 보더라도 자연학도 인문학임이 확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이라는 호박을 기준으로 세상 모든 가치를 해석한다면 기술인들은 호박 줄긋기를 중단할 수 없습니다. 호박과 수박을 모두 맛볼 수 있는 비둘기가 될 때 기술인들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리더가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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