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는 비망록이라고 번역된 책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는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식의 자신만이 간직한 경험과 비밀을 쏟아낸 책이 있지만 실제의 비망록은 “Commonplace Book”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책은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하던 것이다. 당시의 지식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노트를 하였는데, 이 노트의 특징은 자신이 읽은 책에서 감명받은 부분을 그저 옮겨 적은 형태였다.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 발췌를 해서 들고 다니면서 다시 읽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 발췌는 지적인 대화를 하는데 아주 요긴했다. 요즘 TV프로에 고수들을 출연시키고 어떤 주제에 대하여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 있는데, 고수들은 저마다 주장을 펼치면서 그 주장의 근거를 비교적 정확히 대는 것을 자랑한다. 이런 대화에서는 자신이 읽은 책의 지식을 갈무리하고 언제든지 기억에서 꺼낼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중요한데, 바로 이러한 책은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Commonplace란 단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는 공동지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어떤 공동지역을 의미하는 것일까? 비망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매우 사적이고 비밀스런운 것으로 보여 공적인 지역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필자는 이것을 저자와 독자의 공동지역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독서를 하면서 밑줄을 치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을 행간에 써넣기도 하지만, 그 공간은 저자의 체취가 가득한 책이라는 저자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 밑줄 친 부분이나 개인의견을 옮겨서 적은 노트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가득한 자신의 공간이 된다. 공간으로서의 노트는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다양한 책에 언급된 개념을 모아 놓고 이것을 편집해서 책을 묶어내기도 했다. “사랑에 대한 1000가지 참조”와 같은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Commonplace book을 만들고 제본을 해서 남기기도 했다. 일반인 중에는 좋아하는 시를 모아서 자신만의 시 모음집을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수집의 차원에서 매우 좋은 취미생활이 되었다. 무엇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고 그저 마음에 감동이 오는 것을 모아놓고 심심할 때 펼쳐 보고 다시 감동을 느끼면 되기 때문이다.
Commonplace Book의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은 바로 프랑스 시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던진 존 로크였다. 존 로크는 이러한 Commonplace 노트를 작성하는 과정에 새롭게 생성되는 주제에 대하여 이를 잘 정리하여 갈무리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열두 쪽짜리 책을 썼다. 그것은 오늘날 책의 뒤편에 있는 색인(Index)과 같은 방식이다. 로크는 옮겨 적거나 자신이 생각한 주제의 제목의 키워드를 놓고, 이를 분류하는데, 주제어의 첫 글자를 맨 앞에 놓고, 그다음에 등장하는 모음을 다음에 넣어 두 글자로 분류하는 방식을 제안하였다. 일례를 들면 요즘 유행하는 통섭에 해당하는 “Consilience”에 관한 것이면 첫 글자인 C와 첫 모음인 O를 모아서 CO가 코드가 되는 것이다. Frankenstein이면 첫 글자인 F와 첫 모음인 A로 FA에 분류된다. 로크는 이와 같이 분류하면 일생 자신이 관심 갖는 모든 주제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고, 각 주제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지혜를 모았는지를 늘어나는 페이지의 분량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방식은 로크 시대 이전부터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달랑베르를 중심으로 한 백과사전학파의 방식과 잘 들어맞아, 사람들은 Commonplace book을 자신만의 사전을 만드는 방식으로 이해하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했는데, 후일 나폴레옹이 했던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유명한 말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만드는 노력이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큰 지적 호사였음을 가늠하게 해준다.
“창조적이고 영험 어린 공간으로 노트를 만들려면, 생각을 이끌어줄 남의 생각들이 충분히 넘쳐야 한다. 그 남의 생각들이 나의 생각과 충돌하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Commonplace book을 이용하여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서 우선 미국 독립선언서를 집필했으며 제2대 미국대통령에 오른 토머스 제퍼슨을 꼽을 수 있다. 제퍼슨은 15세부터 30세까지 Commonplace book을 만드는 방식으로 스스로 공부한 사람으로, 이 방법으로 위대한 사상가가 되었다. 그의 노트는 잘 보관되어있어, 당시의 Commonplace book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의 지식을 경영하여 위대함에 도달하는 비법이 글쓰기에 있음을 입증한 좋은 사례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을 들 수 있다. 사실 찰스 다윈의 아이디어의 뿌리는 그의 할아버지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바로 빅토리아시대의 Commonplace book의 전형적인 사람으로, 주노미아(zoonomia)라는 commonplace book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것은 할아버지 다윈이 소속했던 달 학회(lunar society)라는 비밀 단체에서 오고 간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되었다. 이 책은 매우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비밀리에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 유포되었다. 달 학회 사람들은 당시 영국의 국교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로 보름달이 뜰 때 등불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달빛으로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에만 비밀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할아버지 다윈의 비망록에는 수많은 새로운 이단적인 사상과 주장이 가득했다. 다윈은 케임브리지 학생 시절에 친구들이 읽고 있는 주노미아를 보고 그것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만든 것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 이후 다윈은 은둔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비밀 노트를 썼는데, 그 노트들은 다 이와 같은 비망록의 전형을 보여준다. 다윈 스스로가 자신이 탁월한 통찰력을 갖춘 영재가 아니고, 지독하게 사실에 집착하고 광적인 수집가이며 오로지 끈기로 사실들을 모아서 아주 미세한 진보를 만들어내는 굼벵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가 오늘날 그토록 유명한 진화론이란 학설을 만들어내는 것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취미생활이 엄청난 역할을 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비망록의 힘을 활용한 위인이 있다.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정민이 쓴 다산 경영법이라는 책에는 다산이 그토록 많은 책을 저술하는 지식경영의 비밀로 “초서 법’을 소개하고 있다. 다산은 남의 책을 읽으면 부분부분 발췌를 해서 종잇조각에 옮겨 적고는 상자에 던져두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쌓이면 상자에서 쌓인 초서들을 꺼내서 다시 읽으면서 이를 분류하였는데, 어떤 주제에 충분한 양이 쌓이면 이를 토대로 책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읽기와 쓰기를 동시에 했다는 점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유럽인들의 방식과 차이가 없다.
우리는 노트를 사는 순간 그곳에 나만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로 가득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실패한다. 그렇게 많은 귀중한 생각이 떠오를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적이고 영험 어린 공간으로 노트를 만들려면, 생각을 이끌어줄 남의 생각들이 충분히 넘쳐야 한다. 그 남의 생각들이 나의 생각과 충돌하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노트는 조그만 공간이지만 수많은 지성이 한마디씩 하는 거대한 지적 올림피아드가 된다. 그곳에서 지적 거장들과 대화를 하며 나의 생각을 펼쳐 보이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생을 마감할 때, 자신의 Commonplace 노트를 살펴보면 평생 무슨 생각을 얼마나 집요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생 중간 중간에도 자신의 관심을 살펴보고 어느 순간 자신이 빠져있는 생각의 함정에서 탈출할 계기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만의 생각만을 쓰겠다는 생각을 던져버리고, 무조건 많이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소 오래된 옛 풍습이지만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고 품격 취미생활인 Commonplace book 글쓰기를 체험해 보면 어떨까 권하고 싶다.
< 방송과기술 VOL.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