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경제학의 아버지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케인즈의 스승인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 경제학에 관심이 있거나 전공자라면 알프레드 마셜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미적분을 경제학에 도입해 문과생들의 골머리를 앓게 만든 장본인이니 말이다. 마셜은 케임브리지 대학에 취임할 당시, “Cool heads but warm hearts”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경제학자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돈의 흐름을 연구하는 경제학자이자 대학교수라는 그의 직위는 주류 계급에 속해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비주류의 입장에서 전 인류가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던 것이다.
나는 마셜의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이라는 휴머니스트적인 사고가 엔지니어에게도 꼭 필요한 가치이자 지향점이라 생각한다. 엔지니어가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냉철한 머리를 소유하는 데 필요한 요소와 뜨거운 가슴을 가지는 데 필요한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차가운 머리를 위한 관문 – 통찰력
한때, 정보를 소유하는 것이 하나의 특권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많은 정보를 가진 이의 ‘박학다식함’은 좋은 머리의 지표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오늘날은 정보의 소유는 더 이상 유의미한 지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 정보를 찾고, 소유할 수 있게 된 정보화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오히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들의 직관에 따라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수집하며,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통찰력’에 주목하게 되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상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좋은 인재의 요건이었다면, 현재는 그 많은 정보들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도출해낼 수 있는 안목과 역량이 좋은 인재의 요건으로 바뀌었다. 가치 창출을 위해서는,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이 눈이 바로 통찰력이다. 통찰력은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대상의 근본 이치와 본질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세상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관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의 사물을 볼 때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양한 관점에서, 그리고 올바른 시선으로 사물이나 혹은 대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 해답을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인류와 세계의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 사회는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잘 사는 대륙과 못 사는 대륙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운명과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보았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사람들은 종종 유전적 우월성 같은 인종주의적 답변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지리학, 동물학, 고고학, 역사학 등 다양한 관점의 접근을 통해 각 사회가 수천 년 전부터 각기 다른 출발 선상에서 경주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적 요인을 하나하나 짚어내고 있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아왔던 역사에 대한 편견 혹은 의도된 인종주의 이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1만3천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세계사를 고찰한 후, “각 대륙의 사람들이 경험한 장기간의 역사가 크게 달라진 까닭은 그 사람들의 타고난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환경적으로 유리한 환경에서 살게 된 집단이 그 작은 차이로 인해 오늘날 우월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낙후된 대륙으로 꼽히는 사하라 사막 남쪽의 아프리카인과 발달한 문명으로 꼽히는 서유럽인이 서로 환경을 바꾸어 살았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180도 다른 역사를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대륙들과 달리 유라시아 대륙은, 책 제목이기도 한 총(무기), 균(전염병), 쇠(기술)를 가지고 먼저 앞서게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경제적·정치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자연 환경 역시 가축화, 작물화에 유리한 조건이자, 일찍부터 도시를 이루게 만든 요소였다. 도시화는 곧 인구 증가에 따른 경쟁과 혁신을 촉진했고, 동서 방향의 축을 형성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적 조건은 문명 간의 교류를 확산시키고 이동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또한, 저자에 의하면 가축화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특징은, 동물들이 보유하고 있는 세균으로 인한 전염병에 대한 내성을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가축화할 수 있는 대상 동물이 부족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면역이나 유전적 저항력을 갖지 못했고, 이는 전염병으로 인한 다수의 사망자를 유발해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다이아몬드 교수의 역사에 대한 접근법은 기존의 학자나 일반인들이 역사를 이해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또한 거시적이고 다양한 시각인 통찰력으로 대상을 이해할 필요를 일깨우는 것이기도 하다. 통찰력은 세상을 여러 각도에서 편견 없이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이다. 세상을 정확히 바라보고,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통찰력의 시작은 자기 자신이 우물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엔지니어 역시 마찬가지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냉철한 머리를 가진 엔지니어, 통찰력으로 새로운 가치를 도출해내는 엔지니어의 시작점일 것이다.
뜨거운 가슴을 위한 관문 – 관용과 연민
논어 『자로』 편을 보면,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부화(小人同而不和)’란 말이 나온다. 다양한 문화와 가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사람들이 조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화(和)의 논리를 가르쳤던 공자의 이 말은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의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자신과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군자의 모습은 관용과 공존을 뜻한다. 반면, 동(同)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시키려는 것이 바로 소인의 모습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따뜻한 가슴의 조건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에서 출발한다. ‘똘레랑스(tolerance)’라 불리는 관용의 정신을 나는 군대에서 배웠다. 나는 운 좋게도 국방부가 보내준 2년간의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카투사로 군복무를 했던 것이다. 카투사는 일반적인 군대처럼 내무반 생활이 없었고, 일과 시간이 끝나면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2인실에서 미군 병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휴대전화는 물론 개인 PC도 사용할 수 있었다. 주말이면 외박, 외출도 가능했고, 뷔페식 식당의 화려한 메뉴도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미국인들의 너그럽고 여유 넘치는 문화는 치열한 경쟁 체제 속에서 성장해온 내게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들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나이, 성별, 인종, 종교, 성 정체성 등으로 인한 차별을 두지 않았다. 직접 그들과 생활을 해보기 전까지 나는, 그들을 개인주의가 강한 사람들이라 오해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변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도왔고, 기부를 자연스럽게 생활화하고 있었다.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행동하고 실천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관용이 진정한 존중과 배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러한 관용은 다시 연민으로 이어진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러하다. 현재 세계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식량이, 세계 전체 인구의 두 배인 140억 명이 먹고도 남을 양이라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그 이면에는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며, 5초에 한 명꼴로 굶어 죽어가는 많은 어린이들이 있었다. 또, 비타민 A의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은 3분마다 1명꼴로 발생하고 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소외된 사람들,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는 이들의 이야기들은, 세상을 탓하거나 불평하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은 내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관용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우주의 별들도 탄생과 성장,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약 50억 년 전에 생긴 태양은 끝없이 수소를 융합해 헬륨을 만드는 핵융합을 통해 빛과 열의 원천을 만들어낸다. 내부의 수소를 다 융합하고 나면 태양에는 헬륨만 남게 될 것이고, 태양이 식으면서 냉각 수축이 진행되면 내부 온도의 상승으로 인한 헬륨의 핵융합이 시작되면서 태양은 신성(nova)이 되고 말 것이다. 이 헬륨마저 다 소모되고 나면 태양은 희미한 백색왜성이 되어 별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태양이 소멸되는 것처럼, 지구 역시 수명을 다하고 말 것이다. 길어야 앞으로 겨우 50억 년 남은 지구의 생명. 영겁의 세월을 보낼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지구의 탄생에서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이 100억 년은 찰나에 불과하다.
무한대 단위의 시공간인 우주의 눈으로 보면 우리 인간은 아주 작은 존재이다. 이러한 사실은 나 자신을 겸허하게 만든다. 세상을 탓하고 타인을 미워하며,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원망하며 보내기엔, 80여 년의 생(生)은 너무나도 짧지 않은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이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섭리이다. 유한한 삶을 사는 동안,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관용과 연민이라는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은 어떨까?
어떤 엔지니어가 될 것인가?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과연 ‘어떤 엔지니어가 될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나 자신에게 던질 수 있었다. 차가운 머리인 통찰력과 뜨거운 가슴인 관용,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덕을 갖추었다고 해서 과연 좋은 엔지니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내가 ‘좋은 엔지니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통찰력과 관용, 겸양이라는 것이 반드시 옳은 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는 시도와 노력이 필요함은 알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졸업생들을 향해 “오늘이 나한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지나간 과거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실행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는 방법이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살아갈 오늘을,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 여기며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기 위한 도전과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도전과 시도, 그리고 노력 속에 통찰력과 관용, 겸양의 덕을 녹여내면서 말이다.
사진 및 그림 출처
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601368
http://interestingtalks.in/London/event/what-can-we-learn-from-traditional-societies
http://blog.daum.net/jungsangun/7691092
http://io9.com/cosmos-and-the-clash-between-academic-and-popular-scien-1569578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