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곱창살인사건>.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연극’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연관 검색어처럼 자동적으로 기억나는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게토에서 벌어지는 동족 잔혹 살인사건정도로 내용을 기억하며, 극 중 배우나 연기자들의 이름, 어떤 연출가의 작품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하지만 지금도 생생한 것은 관람 당시의 느낌, 그리고 극장 공기의 질감, 무대에의 각도 그리고 공연을 보며 했던 이런저런 생각들이다. 그 연극 관람은 연극이란 것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던 첫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연극은 어떤 이미지인가. 대학로 소극장? TV 연기자의 전직? 나의 인생과는 상관없는 다른 이들의 문화생활? 아니면 무겁고 지루한 주제에 뮤지컬보다 재미없는 것? 이렇게 생각해볼 ‘샘플’이 있는가? 이 책을 구독하는 독자 여러분은 종사 분야의 특성이 있는 만큼 문화예술과의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고, 어쩌면 지금 글 쓰는 이보다 더욱 관심 있게 연극을 관람하는 마니아도 분명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막 연극의 매력을 알아가려는 독자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읽을거리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열심히 일하다 심신이 피로할 때 찾는 취미생활 중 하나로 연극 알아보기, 여기에서 나아가 연극 관람하기까지의 동행자가 되고픈 <취미로 연극하기>다.
사람이 있고, 사회가 있고, 연극이 있다!
연극의 매력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공연예술의 가닥을 잡아보자. 악기를 다루는 음악가들의 무대를 제외하고 무대에 오르는 모든 행위들을 공연예술로 보았을 때 크게 오페라, 연극, 뮤지컬, 무용으로 나뉜다. 오페라는 클래식 음악가들의 노래에 극을 입힌 공연으로 소프라노, 테너, 바리톤 등의 성악가들이 연기를 가미하여 노래를 선보이는 장르다. 성악가들은 별도의 확성기(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으며 음악의 반주는 교향악단이 행한다. 뮤지컬은 쉽게 말해 현대판 오페라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은 현재 우리가 즐겨 듣는 가요 형식이고 음악에 배우들은 연기와 노래를 모두 비중 있게 소화해야 하며 오페라보다 적극적으로 안무가 필요하다. 연기자들은 대부분 확성기(무선마이크)를 사용하고 음악은 오페라와 비슷한 편성의 교향악단이 맡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쿠스틱 드럼이나 전자기타 등 현대음악 악기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무용은 등장인물들의 대사 없이 오로지 음악과 안무로만 이야기를 끌어가며 발레나 현대무용이 이에 속한다. 연극은 인물 간의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형식인데 공연예술의 장르 중 그 범주가 가장 넓다고 할 수 있겠다. 약간의 음악이 가미된 연극도 있고 가면을 사용한 가면극도 있으며 물체를 활용하여 사람대신 연기를 하게 하는 인형극도 연극의 장르다. 심지어 대사 없이 제스처와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무언극 즉 넌버벌 퍼포먼스도 크게 보면 연극에 속한다. 마임 또한 그러하다. 사실 이와 같은 구분이 ‘정석’이라고 확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학자마다 연극의 범위를 정하는 기준은 제각각인데 그 이유는 연극이 ‘탄생의 비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림 1. 공연예술의 분류 |
출생의 비밀도 아닌 연극 탄생의 비밀은 무엇일까. 현재까지 가장 널리 인정받고 있는 연극의 탄생은 단체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가설이다.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그들의 생활 모습을 동굴 속 벽화로 남긴 것을 인류 최초의 예술 활동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원시인들의 의식에는 단체의 단합을 위해 또는 초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한 뚜렷한 목적을 표현하는 사람이 소품을 이용해 특정한 행동들을 반복되는 노래에 맞추어 행하며, 이를 지켜보는 구경꾼이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문자가 없을 때 무리에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행한 몸짓과 이야기가 점차 정교해지며 몸의 움직임을 율동으로, 동물의 소리를 모방하는 것에서 연극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이론도 있다. 이러한 종교의식이나 일련의 행위들을 모두 인간이 수행한 최초의 연극으로 생각한다면 연극을 정의하는 두루뭉술한 범주를 이해할 수 있다.
▲ 그림 2. 파피루스에 쓰인 오레스테스 출처 : Wikimedia Commons |
위와 같은 탄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가 등장한다. 연극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유물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대본 형태의 종이다. 기원전 200년에 그리스 문자로 인류 최초의 종이 파피루스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원전 408년에 그리스 극작가 에우리피데스가 작곡한 <오레스테스>의 첫 번째 코러스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자르’라고 하는 연극 형태의 제의식이 있었는데 우리의 민속 ‘굿’의 형식이라 한다. 나쁜 에너지를 멀리하기 위한 주문과 춤이 동반되어 행해졌다고 연구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남겨진 기록은 거의 없다.
고대 그리스 연극은 현재 연극의 형태와 구성의 직접적인 유래라고 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많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바커스)를 위한 종교의식에서 출발했는데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1만 7천 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국가적 행사로 치러졌다. 반원 모양의 야외무대로 분장을 한 배우들, 이들 뒤에서 노래를 담당하는 코러스가 반원 뒤의 직사각형 무대에 올랐다. 악단을 위한 공간과 배우들을 위한 분장실과 의상실도 갖춘 전격 무대로, 그야말로 오늘날 공연장의 구조와 흡사하다. 무려 기원전 6세기의 유물이!
▲ 그림 .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 출처 : Wikimedia Commons |
▲ 그림 . 디오니소스 극장에서의 공연 출처 : Wikimedia Commons |
누군가의 생활 속으로 빠져들기
멀리 돌아와 다시 <순대곱창살인사건>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글을 쓰고 있는 이는 ‘연극은 심각한 것’이라 결론지었더랬다.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모두 비극이고 우리 삶의 모순과 부조리한 것들을 보이며 관객들을 고민에 빠뜨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관람하는 시간이 힘들었고 피하고 싶었다. 내가 사는 매일매일도 충분히 괴로운 일이 많은데 굳이 여가까지 그러한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바라본 연극은 이렇다. ‘생각하는 것!’ 우리 삶의 일부분을 도려내어 무대 위에 앉히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통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만든다. 자신과 주변에 대해 3자적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능동적 매개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의 영화나 TV 드라마와 구별되는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은 그러한 일들이 제한된 장소와 시간에 바로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난다는 현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 동시 상영과 무한 반복 시청이 가능한 영화와 TV 드라마와는 달리 연극은 테이크 원(take one)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같은 공연에 같은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이라도 어제 본 것과 오는 본 것의 느낌은 충분히 다를 수 있다. 심지어 무대 위의 작은 실수 또한 공연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글쓴이는 무용에 익숙한 유년시절과 취미로 한 짧은 뮤지컬 경험 그리고 긴 공백 기간을 지나 공연이 늘 곁에서 열리는 문화예술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그 후 대화와 대화, 그 사이의 정적에 자신의 생각을 입힐 수 있는 연극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업무로도 연극을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이전에는 ‘원작이 같으면 다 똑같지’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본 작품도 다시 보고 싶고, 같은 원작의 다른 연극 작품들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연극을 접한 과정이 일반적인 경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매우 독특한 경우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반복된 일과를 보내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단지 그 일터가 공연장이라 공연 제작의 공급자면서 한편으로는 향유자이기도 한, 양다리를 걸친 위치에서 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연극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모든 ‘공부’가 그러하듯, 특히 누구나의 과거 경험에 비추어보면 알 수 있듯 취미로 하고 싶은 것에 글이 앞서면 쉽게 피로해지기 마련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지만 연극 감상에서는 보이는 만큼 알아가며 ‘즐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취미는 어찌 되었든 즐거워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이 의무가 될 수 있을까? 연극 <멜로드라마>는 결혼이라는 사회 규범의 금기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각 관계’에 처한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에 주목한다. 표면적으로는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사랑과 전쟁>에 나올법한 진흙탕 싸움은 없다. 다만 본능을 좇는 것을 두려워하는 현실 속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들이 무대 위에 있을 뿐.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사랑의 약속을 지킬 것인지 사랑의 열정에 순순히 이끌려도 되는지. 내가 그/그녀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2014.12.31(수) ~ 2015.2.15(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 공연 정보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