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천의 손자병법 인문학 : 싸울만한 상대인가 잘 판단하라

노병천의 손자병법 인문학 : 싸울만한 상대인가 잘 판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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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만한 상대인가 잘 판단하라

칭기즈칸의 부하라 전투

지가이여전불가이여전자승(知可以與戰不可以與戰者勝)
『손자(孫子) 모공 제3편』

1995년 12월 31일,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000년의 마감을 선언하면서 1000년간 최고의 인물을 발표했다. 그가 바로 칭기즈칸이다. 또한 1997년 4월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세계를 움직인 가장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도 그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정복한 몽골제국의 창시자다. 그가 정복한 땅은 오늘날의 몽골, 중국, 러시아를 거쳐 쿠웨이트, 독일, 폴란드 그리고 헝가리 등을 포함했으며, 당대 고려도 그의 간접 지배하에 있었다. 정복한 땅의 넓이는 777만 ㎢로써 알렉산더의 348만 ㎢, 나폴레옹의 115만 ㎢, 히틀러의 219만 ㎢를 다 합한 것보다 넓다. 역사가들은 13세기 칭기즈칸의 정복 전쟁 때 사살된 사람들의 수를 100만에서 3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칭기즈칸  (1155/62/67? - 1227)
칭기즈칸
(1155/62/67? – 1227)

1219년에 출병하여 시작된 호라즘 정벌은 1225년 몽골 고향으로 귀환할 때까지 햇수로는 7년, 그리고 실제 전쟁 기간은 6년이 소요되었다. 이 중 1220년 4월 11일 일어난 부하라 전투는 적의 허를 찌른 기습적인 전격전이었다. 이 전투는 몽골군이 처음으로 서구역사에 그들의 모습을 드러낸 전투였다. 이 전투는 13세기 무슬림 국가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몽골보다 12년 정도 앞선 신생제국인 호라즘은 당시 실크로드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동쪽에서 가장 큰 세력이던 금나라를 1216년 굴복시켰다. 이후 그는 서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218년, 그는 호라즘 왕국의 샤 무하마드 2세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중국과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의 통행을 재개하자는 것이었다. 무하마드 2세는 기꺼이 조약에 서명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몽골 상인들이 호라즘의 북동쪽에 위치한 오트라르라는 도시에 도착해 물건을 구입하기 시작했는데, 오트라르의 총독이 몽골 상인들을 스파이로 몰아 전부 살해했던 것이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칭기즈칸은 무하마드 2세에게 정식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고 책임자 처벌과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그런데 무하마드 2세는 보라는 듯이 그 사절단 몇 명을 죽이고 몇 명은 얼굴을 흉측하게 망가뜨리고 돌려보냈다. 이 행위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무슬림 국가 전체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영향을 미쳤는지 아는 사람은 그때까지 없었다. 상대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이다.

1219년 마침내 칭기즈칸은 호라즘 정벌을 위해 15만 명의 병력을 모았다. 무하마드 2세는 칭기즈칸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무하마드 2세는 40만 명의 정예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영토에서 싸운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두 방향으로 부대를 나누어 호라즘 제국으로 침공해 들어갔다. 한 부대는 호라즘의 북부지역을 향하는 아쿰 사막과 알라타우 산맥 사이의 황폐한 골짜기를 지나는 길로 보냈다. 다른 부대는 위구르 관문을 지나 투르키스탄 북쪽의 천산산맥을 넘어갔다. 영하 50도를 내려가는 천산산맥 추위는 매서웠다. 무하마드 2세는 설마 겨울에 그 산맥과 사막을 넘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몽골군이 나타난 것이다. 1220년 몽골군대는 오트라르에 도착했고 도시의 성채를 바라보며 병력을 포진했다. 장장 5개월 동안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성안에서는 이제 사람들이 지탱할 수 없는 한계에 달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몽골군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곧바로 칭기즈칸은 키질 쿰 사막을 넘어 부하라로 향했다. 칭기즈칸 이전에 사막을 횡단해 정복전쟁에 성공한 군대가 없었다. 이 놀라운 횡단은 역사가들에 의해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것과 같은 충격으로 기록되고 있다.
무하마드 2세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4월 초에 들어서였고, 그때 이미 칭기즈칸은 남쪽 사막 끝에 나타나 누루타를 함락시키고 부하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달린 것이다. 칭기즈칸은 부하라의 성문 중 하나를 열어두어 주둔군을 성 밖으로 나오도록 유인했다. 결국 이 유인작전은 성공했고 4월 11일에 부하라는 함락되었다. 이로써 불과 1달 반 만에 수적으로 열세한 몽골군은 30만에 달하는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여세를 몰아 칭기즈칸은 끝까지 호라즘의 군대를 추격해서 호라즘의 마지막 요새 사마르칸트에 있는 11만의 투르크와 타직 병사들을 섬멸했다. 사마르칸트를 탈출한 무하마드 2세는 칭기즈칸의 추격대에 의해 정신없이 쫓기다가 카스피 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에서 누더기 옷을 입고 굶주림 속에서 죽고 말았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약 50Km 떨어진 전진 불독의 초원지대에 세워진 칭기즈칸 기마상, 높이 총 50m로 2010년 완공되었다. / 출처 : cutterlight.com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약 50Km 떨어진 전진 불독의 초원지대에 세워진 칭기즈칸 기마상, 높이 총 50m로 2010년 완공되었다. / 출처 : cutterlight.com

손자병법 모공(謀攻) 제3편에 보면 승리를 미리 알 수 있는 다섯 가지(知勝有五)가 나온다. 그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싸울 수 있는 적인지 싸우면 안 되는 적인지를 아는 것’(知可以與戰不可以與戰者勝)이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하다. 자칫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무하마드 2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는 칭기즈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칭기즈칸의 전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만의 전쟁방식을 알 필요가 있다. 칭기즈칸은 심리전을 잘했다. 항복하는 자에게는 정의를 약속하고, 저항하는 자에게는 파괴를 맹세하며, 상대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지휘관과 원로와 평민들은 들어라! 신이 나에게 동에서 서까지 지상의 제국을 주었음을 알라. 복종하는 자는 살려줄 것이지만, 저항하는 자는 부인, 자식, 하인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칭기즈칸이 즐겨 쓰던 심리전의 문구다. 몽골군들은 학살을 피해 일부 피난민들이 도망칠 때는 그들을 쫓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다. 그것은 적국 전역에 공포감을 퍼트리려는 일종의 선전술이었다. 칭기즈칸은 현장 중심주의에서 나오는 ‘스피드’를 중시했다. 그 같은 스피드를 가능하게 한 것은 몽골말의 신체적 조건에서 찾을 수 있다. 몽골말은 몇 날 며칠을 달려도 지치지 않는 당대 최고의 비밀병기였다.

몽골군은 항상 말을 개인당 서너 마리 끌고 다녔다. 말안장 주위에는 ‘볼츠’라고 불리는 말린 양고기 또는 소고기가 있었다. 몽골군은 잠자는 것과 식사하는 것까지도 말 위에서 해결했다. 갑옷은 거의 입지 않았고, 입었다 하더라도 가벼운 가죽옷 위주였다. ‘게르’(Ger)라 불리는 몽골군의 천막을 정리하는 데는 약 15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몽골군은 하루 약 300~400km에 해당하는 거리를 주파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칭기즈칸은 강력한 조직력을 가졌다. 전 몽골군을 ‘십진법’에 따라 편성했다. 십호제, 백호제, 천호제 등을 조직했고 이를 통해 국가 조직을 만들고, 그것에 근거하여 몽골을 단단하게 결속시켰다. 무엇보다도 칭기즈칸은 인재를 중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적군이라 할지라도 전쟁이 끝난 뒤 제국의 일원으로 충성을 맹세하기만 하면, 그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은 채 자신의 부하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특히 기술자를 우대하는 등 국가의 장래를 준비하는 데 철저했다. 이런 칭기즈칸이었기에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고, 천 년의 인물이 된 것이다. 이런 그를 어떻게 일개 호라즘의 왕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들었던가. 모든 일에 대세 판단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것이 시작이요 마지막이다.

知可以與戰不可以與戰者勝
지가이여전불가이여전자승
싸울 수 있는 적인지 싸우면 안 되는 적인지를 알아야 이긴다

익히 알려져 있는 칭기즈칸의 어록을 보면서 현재 내 위치에서 다시금 용기를 가져보자.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길이 있다.

知     可     以     與     戰     不     可     以     與     戰     者     勝
알 지 옳을 가 써 이 더불어 여 싸울 전 아닐 불 가할 가 써 이 더불어 여 싸울 전 놈 자 이길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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