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정기를 받으러 영주로

소백산 정기를 받으러 영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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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이란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목적지 없이 달구지를 타고 수렵지를 찾아 느긋하게 정처 없이 집단 이주한 데서 유래됐다고 하기도 하고, 유럽 사람들이 대자연을 찾아 서두르지 않고 걸어서 여행을 한 데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트레킹이 유행하기 전에 우리가 하던 관광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관광이란 자신의 일상생활권을 벗어나 다른 지역의 자연경관이나 문화를 감상하거나 관람하며, 지식체험, 휴양, 행사참가 등등의 활동으로 정신적 육체적 생활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동활동이며, 일시적으로 거주지를 떠나 일이나 영리의 목적이 포함되지 않은, 순수하게 여가를 즐긴 후 귀가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되어 있다.

그렇다면 트레킹이, 세월이 흐르면서 문명이 발달하고 생활이 풍족해 지면서 변화된 것이 관광이 아닐까?

경상북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영주시는 해발 약 200m이고,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있으며 소백과 태백권 교통의 중심도시다. 토질은 대부분이 사질양토로 각종 농산물이 잘 자라며, 특히 북부 산악지대는 사양토이기 때문에 배수가 잘되어 인삼, 사과 등의 생육에 적절하다. 2시간 10분을 달린 버스가 영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이 늦은 3시다. 출발 전에 미리 알아 둔 렌터카 회사에 가서 소형 승용차를 빌려 영주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부석사로 향했다.

 

   
 
   
 
   
 
   
 
   
 
   
 
   
 

부석사 그 천년의 세월

신라 문무왕 16(676),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 부석사 일주문에는 <太白山 浮石寺>라고 새겨져 있지만 실제로 부석사를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는 산은 소백산이다. 일주문까지 가는 길 중간 중간에 아늑한 산책로가 있는데, 어떤 곳은 나무계단으로 멋을 부렸고, 어떤 곳은 넓고 포근한 흙길이다. 가볍게 산책을 하고 큰길로 나오니 양쪽에는 은행나무가 보기 좋게 늘어서 있다. 하늘을 찌를 듯이 키가 큰 은행나무, 사람으로 치면 지하철 공짜로 탈 때도 훨씬 지났을 나무의 나이를 가늠하며 걷다가 뜬금없이 은행(銀行)과 은행(銀杏)이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銀行)은 돈이 있는 곳이다. 돈이 좋은 뜻으로 쓰이면 더없이 아름답지만 잘못 사용되어 썩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시궁창이 된다.

은행(銀杏),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면 그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지만 알맹이가 떨어져서 썩으면 이 또한 구린내가 진동을 한다.

별스런 생각을 해 가며 올라가노라니 무량수전이 눈앞에 나타났다 .

무량수전(국보 제18),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고 아름답기가 으뜸인 현존하는 목조 건물, 목조구조 기술의 정수라는 배흘림기둥이 고색창연한 기와지붕의 추녀를 감싸듯이 받혀주고 있고, 그에 힘입어 그려놓은 듯한 지붕의 곡선이 푸른 하늘로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다. 회색빛 문창살에 하얀 창호지는 깨끗함을 넘어 흰색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무량수전 정면에는 국보 제17호의 석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석등으로, 높이 2.97m8각 기둥, 사방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만든 창 위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돌을 얹어 한껏 멋을 부렸다. 이렇게 국보 5점과 보물 6,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지닌 부석사는 부석사 자체가 문화재다. 게다가 국보급의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안양루가 있어서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부석사의 저녁노을을 만나기 위해 몰려 와서 석양에는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노을 지는 시간을 기다리며 이번에는 부석(浮石)을 찾아 나섰다. 부석은 무량수전 바로 옆에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어디가 떴는지 알 수 없으나 바위에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진 것을 보니 부석인가 보다.

 

   
 

하늘에 구름이 많다. 저녁노을을 보기는 틀린 것 같다. 카메라맨들이 실망하여 하나 둘 자리를 뜬다. 하지만 그냥 갈 수야 없지 않은가! 구름 사이로 막바지 숨을 몰아쉬는 태양이 날카로운 빛을 발사했다. 찍고 보니 그럴듯한 작품이 나왔다.

부석 면소재지에서 민박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영주시청에서 가지고 온 지도를 보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순흥 소수서원 가는 골골에는 누런 나락과 까만 포도, 빨간 사과가 가을을 알록달록 풍요롭게 수놓고 있었다.

   
 

   
 

소수서원, 우리나라 최초의사액서원

사액서원이란, 임금님으로부터 편액,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고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한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7(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의 유학자이며 최초의 성리학자인 회헌 안향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 그분을 기리고자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고, 이후,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조정에 건의하여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게 되었다.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지만 소수서원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최초의 사액서원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수서원 초입에 빼곡하게 들어선 늙은 적송의 기품이 보는 이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든다. 사찰과는 또 다른 무게가 느껴지는 것은 지난날 선비들의 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서원 오른쪽에는 죽계천이 흐르고 천 건너 산자락에는 산수화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취한루라는 이름을 가진 정자가 객도 없이 저 홀로 취한 듯이 앉아있다. 서원의 첫 번째 문을 들어서니 건물들의 배치가 무척 편안해 보인다.

강학당, 저곳에서 유생들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훗날에 나라의 기틀이 되기 위해, 오늘날의 입시생 못지않게 고민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비상을 꿈꾸었겠지! 초가을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이름 모를 나뭇잎이 간 날의 선비의 도포자락을 연상케 한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린다. 선비의 책 읽던 소리가 저리 듣기 좋았겠지! 본 적도 없는 옛날 선비를 흠모하며 소수서원의 전각들과 후원을 휘돌아 나와 선비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비촌, 희미한 호롱불 아래

예로부터 학문과 예()를 숭상했던 선비! 선비 중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였던 회헌 안향 선생의 고향인 순흥에 선비촌이 자리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선비촌은 영주의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했다고 한다. 마을은 수신제가, 입신양명, 거무구안, 우도불이빈 등 네 가지로 조성되어 있다.

선비촌 초입에 자리 잡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지붕의 위세만으로도 그곳에 살았던 사람의 기개가 느껴진다. 더 안으로 들어가니 어른 키 높이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대청을 가진 ㅇㅇㅇ씨 종가가 있었다. 선비가 어찌 저렇게 웅장한 집에 살 수 있는지 참 궁금하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하인을 부리는 기분은 어땠을까!

길 건너편에는 눈곱만큼의 꿀림도 없는, 기와집처럼 웅장해 보이지는 않지만 참으로 평화롭고 안락해 보이는 초가가 있었다. 그 집안에 살던 선비는 소찬에 보리밥을 먹을망정 세속과 타협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라가 위급할 때 분연히 일어섰다가 백성이 편안해 지면 명예나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소죽 끓이는 사랑에서 흔들리는 호롱불 아래 서안을 마주하고 앉아 낭랑하게 책을 읽었으리라.

선비촌은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관람을 하면 참 좋겠다. 아니면 아예 템플스테이를 해도 좋을 것 같다. 초가에는 초가에 어울리는 한데 아궁이와 장독대가 있고, 헛간에는 망태와 탈곡기, 쟁기가 있다. 기와집 역시 그 위세에 어울리는 살림살이가 있어 시대의 생활상을 잘 반영해준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농기구를 직접 만져 보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탈곡기를 밟아 직접 나락을 터는 체험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또한, 영주는 주위의 아름다운 배경 덕분에 TV드라마 촬영지로 인기가 높다. 특히 선비촌과 무섬마을에서 촬영을 많이 한단다.(추노, 동이, 짝패, 공주의 남자, 해를 품은 달, 사랑비 , 각시탈 )

   
 

   
 
   
 
   
 
   
 

희방폭포와 착한 자연

소백산 비로봉,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천문대가 있는 산!

희방폭포는 소백산에서 최고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1,439m)으로 올라가는 해발 850m 지점에 있다. 폭포의 높이는 28m로 영남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희방사에 가려면 폭포 옆에 놓인 철계단을 30분가량 올라가야만 된다. 철계단이 싫으면 평탄한 길로 올라가서 내려올 때 폭포 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겠으나 지난여름 장마 때 지반이 물러지면서 낙석 위험이 있어서 폭포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출입을 금지해서 조금 아쉬웠다. 가을이라서 폭포의 물줄기는 그다지 풍요롭지 못했다. 그 대신 주변의 나무들이 갖가지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폭포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장마 뒤엔 천지를 진동하는 폭포소리에 귀가 먹먹하다니 감히 폭포의 기세를 가늠할 수가 없다.

등산이 힘드신 분들은 희방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슬슬 걸어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이면 사진까지 찍으면서 유유자적할 수 있는 거리이다.

 

   
 
   
 

삶의 애환을 간직한 죽령옛길

이번 영주 관광의 주된 코스가 죽령옛길 트레킹이다. 소백산 제 2연화봉(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0)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지점에 자리한 해발 696m의 죽령. 삼국사기에 아달라왕 5(서기 158)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이 있다고 했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죽령은 삼국시대에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하는 불꽃 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서기 590, 고구려의 명장 온달 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등의 기록(삼국사기)으로 보아 당시의 죽령이 막중한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만하다.

죽령, 조선 시대 때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가장 중심이 되었던 길이다. 영남대로 중에서 중간에 위치한 죽령옛길은, 장원급제해서 금의환향하는 선비들이나 한양에 물건을 팔러 가던 장사꾼들 할 것 없이 넘기 힘들었을 높고 험한 고개다. 오래 묵혀둔 길이라서 지금은 좁은 오솔길이 되었지만, 그래서 운동 삼아 걷는 길이 되었지만, 그 옛날 이 길을 따라 바리바리 이고 지고, 혹은 애끓는 사연 가슴에 안은 채 이 길을 갔을 이야기들은 어디쯤에서 부려졌을까!

죽령옛길은 2.8km의 트레킹 코스 반, 수월한 등산 코스 반으로 보면 좋겠다. 죽령옛길이라고 쓰인 안내석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니 아담한 소백산 역이 있다. 열차를 이용해서 죽령옛길을 걸으러 오려면 소백산역에서 내리면 바로 옛길 입구다. 길 양편은 제법 깊이 들어가도록 사과 과수원이 이어졌고, 과수원이 끝나면 우거진 잡목이 멋진 터널을 만들어 과객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더해 줬다. 어쩌다 철 잃은 철쭉이 새빨갛게 웃는가 하면 수굿하게 핀 구절초가 험한 옛길을 다소 순해 보이게 했다. 한눈에 봐도 옛길 주변이 청정지역임을 알 수 있지만,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민들레 잎을 뜯어 씻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풀어 쌈을 싸 먹는 모습은 조금 놀라웠다.

   
 

   
 

죽령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변화가 많아서 심심하지 않았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길은 가팔랐다. 1시간가량을 올라가니 드디어 죽령 정상에 죽령루가 보였다. 죽령 정상에는 영주와 단양의 경계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고 죽령 주막이 있었다. 죽령 터널이 뚫린 후 이곳은 관광지가 되어 일부러 나들이 오는 사람들과 단양과 영주를 오가는 사람들, 옛길을 걷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었다. 주막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은 마치 청량음료처럼 시원하고 맛났다.

이로써 계획한 이틀간의 일정은 모두 끝났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풍기에 5일장이 서는 날이다. 얼른 내려가서 풍기인삼과 풍기인견에 대한 정보도 알아보고, 인삼 갈비탕도 먹어야 봐야겠다.

 

   
 
   
 

*Tip 풍기인삼과 풍기인견

풍기인삼, 신라 시대 때부터 소백산에 산삼이 많이 자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 신제 주세붕 선생이 1541년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산삼에만 의존하던 것을 인위적으로 재배 생산케 했으며, 그 수요를 충족하고자 전국에 인삼이 자생하는 토양과 기후가 비슷한 곳을 찾던 중 풍기가 인삼재배에 적합한 곳임을 발견하고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인삼재배를 시작했으며 조정에서는 풍기인삼만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풍기인견, 주원료는 정제된 낙엽송의 목재 펄프와 면씨앗에서 분리한 잔털의 린터가 쓰이며 셀룰로오스 섬유를 원료로 하여 제조한 순수 천연섬유다. 성질은 가볍고 시원하며 몸에 붙지 않고 통풍이 잘되며 착용 시 촉감이 아주 상쾌하며 땀 흡수력이 좋다. 정전기가 전혀 발생하지 않아서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피부가 약한 사람이나 피부병이 있는 사람에게 아주 좋다. 세탁기를 사용할 때는 망에 넣어서 하고, 섬유유연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교통 정보

내비게이션 : 영주, 부석사 혹은 순흥소수서원

고속버스 : 동서울, 강남터미널 < – > 영주(136, 2시간 30분소요)

동대구 중앙고속터미널 < – > 영주(121, 1시간 50분소요)

부산 동부시외버스정류장 < – > 영주(116, 3시간 30분소요)

열차편 : 청량리 < – > 풍기, 영주(19, 중앙선)

대구, 동대구 < – > 영주(12회 중앙선) (13회 경북선)

부산, 부전 < – > 영주(13회 중앙선) (13회 경북선)

 

먹을거리 정보

풍기인삼갈비 : 054-635-2382. 약선당한정식 :054-638-2728. 굴국밥전문점 : 054-632-2282

 

잠잘 곳 정보

소백산풍기온천리조트 : 054-604-1700. 괴헌고택민박 : 054-636-1755. 그랜드모텔 : 054-633-7266

 

< VOL.203 방송과기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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