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산 기행 – 한라산 백록담(漢拏山 白鹿潭)

한국의 명산 기행 – 한라산 백록담(漢拏山 白鹿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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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그 준비의 설렘부터가 시작입니다. 어디를 어떻게 가고, 뭘 준비해야 하고 뭘 먹을까? 잠은 어디서 자고 아, 날씨는 어떻지? 이 모든 즐거운 고민으로 마음 설레는 순간 이미 여행은 시작된 것이지요. 이번 여행은 대학 동창들과의 술자리에서 시작됐습니다. 동창의 친구가 제주도 지점에서 근무한다고, 주말 동안 오피스텔과 렌터카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의기투합하고 스마트하게 비행기를 검색해보니 토요일은 비싸고(항공권 가격비교 사이트가 많이 있는데요, 그냥 편하게 네이버에서 ‘제주항공권’ 치면 됩니다) 일요일 새벽 비행기로 가서 월요일 저녁에 오는 일정으로 낙찰입니다.

3주를 남겨두고 이메일이 시작됐습니다. “첫날은 한라산, 둘째 날은 해안일주하자” Re “그래. 한라산은 무조건 가는 거고, 해안일주는 하루에 무리다. 반만 돌자”ReRe “근데 한라산은 어데로 올라가노? 성판악이가? 관음사가?” ReReRe “ 당근 성판악-관음사지. 근데 담날은 힘드니까 좀 할랑하게 다니자. 반일주도 빡시다”ReReReRe “비보다. 내 친구 출장 간다. 도루묵 됐다. 우짜노?”ReReReReRe “이런, 윤구스!!(별명입니다) 그냥 숙소 예약하고, 차도 렌트하자. 윤구스 니가 숙소 알아보고 잡아라” ReReReReRe “근데, 비행기 내려서 아침 무야지? 어데가 맛있노?” ReReReReReRe “애들이가? 소풍가는 것 맨키로 들떠갖고는”이번 여행에 동행하지 못하는 친구가 심술을 부립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참 애들같이 놀고 있었네요. 덕분에 무료한 일상의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출발일이 코앞입니다.

내일이 비행기 탑승일입니다. 햇살 좋은 토요일 오후, 창문 밑에 기대앉아 ‘빙벽’을 읽습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준비한 일본 작가의 소설입니다. 겨울 한라산에 어울려 보여서요. 책을 읽으며 상상여행을 하는 사람을 ‘Armchair Traveller’라고 하는데, 저는 가끔 이런 독서에 사치를 부려봅니다. 책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무대로 직접 가서 그 책을 읽는 거지요. 이렇게 읽는 책은 문장 한 줄 한 줄이 바로 몸으로 스미는 듯합니다. 장소를 공유하고 내용에 공감하면 감동은 증폭되어 여행은 더 깊고 다채로워집니다. 추억도 진해지지요. ‘빙벽’을 펼쳐 드는 순간 저는 이미 한라산입니다. 여행의 확장입니다.

06시 35분 김포공항발 티웨이 항공입니다. 등산시간하고 항공권 가격만 고려하다 보니 너무 이른 시간으로 잡아버렸습니다. 대중교통이 없습니다. 집이 먼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자가용으로 오기로 합니다. 20분 전까지 발권 가능인데, 저는 지하철 첫차를 타면 딱 맞을 듯합니다.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시간이 남네요.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 오래 봐온 얼굴들입니다. “왔나” “그래” “가자” 부산 놈들답습니다.

제주공항에서 렌터카로 이동하니 정면으로 한라산 영봉이 보입니다. 정상은 하얀 생크림을 바른 케이크처럼 소담스럽게 우뚝하고 좌우로 부드럽게 흘러내린 능선은 차로 백록담까지도 달릴 듯 완만합니다. 성판악 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백록담까지 올라가는 등산로는 성판악, 관음사의 두 코스밖에 없습니다. 관음사 코스가 더 길고 지루해서 보통은 성판악으로 오릅니다. 볼일(?)도 보고 점퍼도 벗어 배낭에 욱여넣습니다. 자, 이제 출발입니다.

이틀 전에 눈이 많이 온 모양입니다. 솜이불을 덮어 놓은 듯 포근하다 못해 묵직한 무게감까지 주는 설경입니다. 굴거리나무들만 반들반들한 초록 잎으로 다소곳합니다. 마치 우리가 태풍 속에서 미리 우산을 조금 접어버리듯 잎사귀들을 비스듬히 접어버린 모양새는 자연의 오묘한 전략으로 보입니다. 눈은 잎에 쌓일 생각도 못 해보고 미끄러져 버렸을 테지요. 따뜻해지면 다시 활짝 기지개를 켤 것입니다. 홀로 환한 굴거리를 보니 정말 제주에 왔구나 싶습니다. 30분쯤 걸었나요? 표지판이 나옵니다. ‘진달래 대피소(남은 거리 6.0km)에 12:00까지 통과해야 정상을 갈 수 있습니다’라는. 등산객 안전을 위해 하산 시간을 고려한 출입통제입니다. 부지런히 걸어야겠습니다.

언제부턴가 굴거리나무는 사라지고 저는 어느새 침엽수인 편백나무 숲 속을 걷고 있습니다. 쌓인 눈뭉치로 휘청 늘어진 가지와 쭉쭉 뻗은 편백나무의 수직감, 저만치 걸어가는 노란 점퍼의 등산객. 그림입니다. 바람도 한 점 없어 후드득 쏟아지는 눈뭉치 소리가 낭랑하게 메아리칩니다. 서어나무도 슬슬 보이기 시작하네요. ‘숲 속의 보디빌더’라는 별명처럼 올록볼록한 이두박근의 몸집들이 참 예쁩니다. 아, 겨우살이입니다. 나무마다 가지 꼭대기에 겨우살이를 하나씩 둘씩이고 있습니다. 한자어로 동청(冬靑)이라고 하는데요, 메마른 가지에 붓으로 점점이 찍어 넣은 듯 초록으로 화사합니다. 빨간 꽃도 피었군요.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올려다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사라오름 입구. 원래 계획은 오름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잠시만 쉬었다 진달래 대피소로 향합니다.

친구들과의 산행은 은근히 경쟁적입니다. 남자라서 그럴까요? 대학 동창이라서 그럴까요? 곁님과 걸을 때처럼 느긋한 여유를 즐기기가 쉽지 않네요. 사진 좀 찍다 보니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습니다. 서둘러 쫓다 보면 저 또한 밭은 숨을 쉬게 되고요. 게다가 12시 출입통제가 자꾸만 등을 떠밉니다. 마라톤 주자가 된 기분입니다. 그것도 컷오프가 있어서 12시까지 중간지점을 통과하지 못하면 자동 탈락되는 마라톤입니다. 때마침 친구 하나가 다리에 경련이입니다. 이런 경우 바로 쉬어 주는 게 좋습니다. 이제 얼마 안 남은 듯하지만, 원래 정상 바로 밑이 제일 힘든 법입니다. 양갱을 하나씩 나눠 쥐고 한 입 베어 뭅니다. 제가 꼭 챙기는 산행 간식입니다. 꼭 ‘해태연양갱’여야 합니다. ‘밤맛 해태연양갱’도 안 됩니다. 추억의 맛은 바뀌지 않습니다.

마지막 한 걸음에 올라서니 사방이 탁 트입니다. 백록담 영봉이 우묵하니 솟아있고 우측으로 진달래 대피소가 보입니다. “조오타”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풍경입니다. 11시 40분. 대피소 안은 사발면을 사기 위한 긴 줄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한라산은 취사가 전면 금지되기 때문에 우리도 저 줄의 꼬리를 매달려 뜨끈한 사발을 받고 싶지만, 12:00 전에 차단소를 통과해야 합니다. 눈물을 머금고(친구 하나는 정말 울 것 같습니다) 차가운 김밥만으로 간단한 점심을 합니다. 물론 소주는 있습니다. 빠뜨릴 친구들이 아니지요. 그나저나 정말 사람 많네요. 북적북적 웅성웅성 거의 시장바닥입니다. 이래서 제가 주말 등산을 안 합니다. 숙박산행은 꼭 일요일을 첫날로 잡는데요, 그럼 이런 번잡함을 피할 수 있습니다. 대피소 예약의 수월함은 덤입니다.

이제 백록담을 올라야지요? 대피소에서 2.3km, 1시간 이상 걸릴 듯합니다. 걷다 보니 눈앞에 귤이 있습니다. 구상나무에 귤이 열렸습니다. 고맙게 수확(?)해서 입에 넣으니 싸한 귤향이 대뇌피질까지 리프레쉬시킵니다. 그런데 누가 귤을 거기 뒀을까요? 산타 할아버지가 따로 없습니다. 마침 구상나무 가지에 얹어 놓았으니 정말 산타네요. 구상나무는 한국이 원산으로 라틴어 학명에도 ‘Koreana’가 들어있는데요, 크리스마스트리용으로 해외에서 제일 인기 있는 수종입니다. 귀한 나무라서 한라산, 지리산의 고지대에서만 볼 수 있답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조금씩 커지는 눈 덮인 영봉에는 지그재그로 사람의 행렬이 가파르게 붙어 있습니다. 외길이고 사람이 몰리니 정체가 빚어지나 봅니다(기껏 대자연에 왔는데 정체라니 싶습니다). 그 모습이 성스런 순례 행렬 같기도 하고 피라미드 공사에 강제 동원된 노예 같기도 한데요, 대조적인 두 감상이 스스로도 재밌게 느껴집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불평하느냐 감사하느냐에 달려있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감사하며 저 또한 지그재그 행렬에 합류합니다.
옆만 보면 경사가 60°도 더 되는 것 같습니다. 발밑으론 서쪽에서 몰려온 구름층이 산을 휘감고 있고 뒤돌아 멀리 눈길을 던지면 오름들이 아스라이 솟아 있습니다. 멀리 제주의 해안선도 둥그렇게 보입니다. 제주가 섬임을 진하게 느낍니다. 언젠가는 8848m 히말라야 정상에 서서 지구가 구(球)임을 느껴보고도 싶습니다. 이글루 스타일의 건물을 지납니다. 비상대피소인가요? 어처구니없게도 와이파이 마크가 그려져 있습니다. 저 마크가 반가운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아니네요. 마치 “여기 와이파이 터지니 빨리 핸드폰들 꺼내세요” 라고 굳이 알려주는 과잉친절로만 보입니다.

정상이 가까울수록 소란스러움은 더해갑니다. 호주에 ‘필립아일런드’라는 섬이 있습니다. 매일 밤이면 펭귄들이 단체로 뭍으로 올라오는 진풍경이 펼쳐져 꽤 인기 있는 관광지입니다. 배낭여행 중에 마침 근처에 묵게 돼서 유명하다는 그 해안으로 자전거로 유유자적 가보았더랬지요. 해안이 보이기 전부터 공기에서 느껴지는 소란스러움과 버스 엔진소리에 조금 당황했습니다. 해변 주차장에는 관광버스 수 십대가 늘어서 있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1000명은 모래사장 쪽에 몰려있더군요. 결론은, 그날 펭귄보다 사람을 몇 배는 더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저만큼이나 펭귄들도 당황스러웠을 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정상입니다. 아마도 ‘백록담, 해발 1950m’라고 새겨져 있을 비석이 ‘白’자만 눈 위로 삐죽 솟아 있습니다. 그 뒤로 나무 울타리에는 상고대가 엄청난 두께로 바람결대로 뻗어있는 게 보입니다. 한발 한발 분화구로 다가서면서 자연 긴장합니다. 백.록.담.이니까요. 울타리 너머로 드디어 백록담의 전경이 펼쳐집니다. 아, 이게 백록담이군요. 잠시 아무것도 못 하고 바라봅니다. 멋집니다. 하늘은 투명하게 맑아서 태양 냄새가 날 듯하고 백록담은 거대한 원반처럼, 우주의 광활한 솥처럼 그 하늘을, 만물을 포용합니다. 내려다볼 때마다 세차게 나를 쓸며 아래로 끌어당기는 매서운 바람의 기세는 한라산의 힘찬 기상 같아 버티고 선 두 다리에 바짝 힘이 들어갑니다. 사실, 조금은 더 울컥할 줄 알았는데 담담하네요. 그래도 충.분.히 좋습니다.

 

백록담 위를 유유히 활공하는 매를 보면서(까마귀인 듯도 한데 매라고 생각하렵니다) 백록담에 아쉬운 인사를 합니다. “다음에, 눈 없을 때 또 보자” 마음으로 말을 건네며 북쪽 관음사 코스로 내려섭니다. 하산길 방향으론 구름이 없어 제주시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림입니다. 길은 점점 가팔라집니다. 아이젠에 스틱까지 짚어도 미끄러지기 일쑤입니다. 앞서 가던 친구가 웬 여인과 나란합니다. 팔짱까지 꼈습니다. “으악, 오빠, 천천히” 여인이 친구한테 아예 매달리네요. 저도 따라붙어 슬며시 옆에 서 봅니다. “음” 아주머닙니다. 우리보다 10년은 위로 보이는데, 오빠라니요? 화들짝 놀라 앞서 걸으려는 찰나, “악”하는 소리와 함께 제 팔도 붙잡힙니다. 셋이서 힘들게 힘들게 급경사를 내려옵니다. 혼자라면 별로 어렵지 않을 길이 셋이 엉키니 더 위태롭습니다. 하지만 부들부들 떠시기까지 하시는 아주머니를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한바탕 주르륵 미끌리며 다함께 5미터 넘게 몸 썰매도 탑니다. 이 와중에 얄밉게도 친구 한 놈은 신나게 엉덩이 썰매를 타고 있네요. 겨우 도달한 평탄한 길 위에서 아주머니의 건투를 빌며 헤어집니다.

15:20. 삿갓봉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대피소 앞에 솟은 삼각형 봉우리를 보니 왜 삿갓봉 대피손지 절로 알겠습니다. ‘대피소’라 하지만 저는 보통 ‘산장’이라 부릅니다. 대피소라 하면 자연 긴박함이 연상돼서 저는 낭만적인 산장이 좋습니다. 잠시 한숨 돌리면서 다리쉼을 하고 다시 출발합니다. 줄곧 제주의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걸어 내려갑니다. 반쯤 파묻힌 ‘해발 1000M’ 표지석도 지나고 서로 손잡은 나뭇가지들의 눈 터널도 통과합니다. 슬슬 지겨움에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쯤 이리저리 휘어지며 계속되던 길 위에 드디어 결승선이 나타납니다. ‘한라산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결승선’은 다소 생뚱맞고 조악해 보이지만 다들 해맑게 웃으며 지납니다.

‘보이후드’란 영화를 보면 그랜드캐년에 앉아서 이런 말을 합니다. “Seize the moment 라고 하는데, 난 이 말이 거꾸로인 거 같아. ‘Seize the moment’가 아니고 ‘The moment seize us’ 가 아닐까?” 우리는 치열하게 ‘현재를 잡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나서 돌이켜보면 오히려 ‘현재가 우리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추억은 순간으로 남은 현재들인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이 찬란한 순간을 최대한 음미하며 사는 것 아닐까요? 친구들과 함께한 백록담의 순간이 우리 모두를 강하게 움켜쥐었음을, 하품 이후 갑자기 현실감을 띄는 세계 속에서 깨닫습니다.

짧은 덧붙임.
진달래 대피소에서는 꼭 사발면을 드시기 바랍니다. 사발면만 12시 전에 산다면 그걸 들고 차단소를 통과해서 적당한 곳에서 드시면 됩니다. 마라톤 주자가 생수병을 낚아채서 들고 뛰듯이 말입니다. 통제시간에 쫓길 때라도 12:10 정도까지는 통과되는 듯합니다. 저희는 그걸 몰랐네요. 그래도 충.분.히 좋은 산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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