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찾아 나섭니다. 봄, 참 아름다운 우리말입니다. ‘보다’에서 파생된 ‘봄’은 말 그대로 볼 것이 있는 계절을 이릅니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만으로 버텨온 나무에 마침내 초록 움이 트고 누렇고 푸석한 땅에서는 노랑, 분홍의 꽃들이 기지개를 켜며 솟구칩니다. 매주 중계소 점검을 다니는 용문산엔 아직 잔설이 남아 반짝이지만, 그 눈 밑에서 봄이 부지런히 축제를 준비하고 있음을 압니다. 수도권에서 봄꽃을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산이 남양주 천마산입니다. 홀가분하게 집을 나서서 5호선, 7호선, 경춘선으로 갈아타며 장장 2시간여의 여행(?) 끝에 평내호평역에 도착합니다. 끝이 아닙니다. 다시 165번 마을버스를 타고 정류소 7곳을 지나면 ‘천마산 등산 입구’, 오늘의 산행 기점입니다.
이번 산행은 등산보다는 야생화에 초점을 맞추어서 일반적인 등산코스가 아닌 천마산 야생화 코스로 계획했습니다. 천마산의 ‘팔현리 계곡’은 이 계절이면 야생화 천국이 된다고 합니다. 팔현리에서 돌핀샘을 거쳐 정상을 오른 후 천마의 집으로 하산하는 코스입니다. 아쉬운 점은 대중교통으로는 팔현리가 너무 외진 곳이라 저처럼 ‘수진사’(천마산 등산 입구)에서 출발하시는 분들은 일단 ‘천마의집’까지 오른 후 ‘오남저수지’ 이정표를 따라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내려서서 ‘팔현리 계곡’ 입구까지 오셔야 합니다.
등산로 입구에 사진을 곁들인 ‘천마산의 야생식물’ 안내판이 있습니다. 야생화를 잘 모르시는 분도 휴대폰으로 한 컷 찍어두면 산행 중 이름 모를 예쁜이를 만났을 때 유용하겠습니다. 임도 옆으로 시내가 흐릅니다. 졸졸졸 기분 좋은 소리를 따라 물가로 다가섭니다. 생명의 근원은 물입니다. 봄은 물과 함께, 물 곁에서 먼저 피어납니다. 보랏빛 현호색이 드문드문 보입니다. 잎이 얼룩덜룩한 게 점현호색입니다. 한구석에 제비꽃도 있고 바위 밑엔 큰괭이밥이 숨어있네요. 물속에 해가 들어있습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시냇물 한쪽에 개구리알도 보입니다. 개구리 알은 뭉쳐있는 파전 모양이고 도룡뇽 알은 양파링처럼 고리 모양입니다. 올챙이는 없나 한동안 들여다보다 다시 임도로 올라섭니다.
구불구불 임도를 따라 걷습니다. 봄이 꽃만의 축제는 아닙니다. 돋아나는 새싹과 경쟁이라도 하듯 새 생명도 여기저기서 환호성을 질러댑니다. “쏙쏙쏙쏙” 쏙독새인가요? “휘이익휘이익”하는 이름 모를 새소리도 들립니다. 꼭 휘파람 소리처럼 들려서 어서 올라오라고 나를 불러대는 것만 같습니다. 새를 글로 공부했습니다. 박새는 “쭈뼛쭈뼛” 운답니다. 한동안은 온 세상에 박새밖에 없는 것 같더군요. 이 새도 “쭈뼛” 저 새도 “쭈뼛” 모든 새소리가 다 “쭈뼛쭈뼛”으로 들렸습니다. 책도 사고, 동영상도 찾아보면서 조금씩 그 다름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자주 마주치는 녀석들은 다 알아봅니다. 오월이면 검은등뻐꾸기도 돌아올 테지요. 특유의 리듬과 낭랑한 목청으로 온 산을 울리지만, 조심성이 많아 결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답니다. 이 녀석 찾느라 한 2년 고생했습니다. 소리만으론 검색하기가 참 힘들더군요. ‘꾸꾸꾸꾸’, ‘꼬꾸꼬꾸’, ‘오월에 우는 새’, 휘파람새’ 등으로 숱하게 검색해봐도 비슷하게 우는 새도 못 찾았습니다. 결국 알아낸 이름, 검은등뻐꾸기 일명 ‘홀딱벗고새’였습니다. “홀.딱.벗.고~” “홀,딱,벗,고~” 그러고 보니 정말 “홀딱벗고”라고 웁니다. 알고 보니 그런데 알기 전엔 절대 모를 소리. 선입견의 강력함입니다. 오월이면 거의 모든 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미치광이풀입니다. 이름 살벌하지요? 예, 독풀입니다. 먹으면 미친다는. 한 3년 만에 보는데요, 집 나간 아들이라도 다시 만난 듯합니다.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모양이 꼭 그렇습니다. 어느덧 천마의 집, ‘오남리 호수공원’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오솔길이 어렴풋한 것이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입니다. 갑자기 적막이 덮치는데 외려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 듯해 설렙니다. 나비도 날고, “어, 올해 나비는 첨인가?” 그렇군요. 작고 예쁜 봄이 날아다닙니다. 길옆에는 바람꽃, 현호색이 지천이고 보랏빛 얼레지는 막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얼레지, 누구든 한 번만 보면 홀딱 빠질 미모입니다. 꽃말도 바람난 처녀, 제가 꽃말은 참 못 외우는데 얼레지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얼레지는 잎이 얼룩덜룩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야생화가 좋더라는 소문만 듣고 건들건들 천마산을 첨 찾았을 때의 그 얼레지 군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경사면이 온통 얼레지로 뒤 덥혀있어 얼레지가 산사태를 일으키듯 제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었지요. 그 강렬한 환상이 저를 매년 천마산으로 이끕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당시 얼레지 세 송이를 캐서 집 화분에 옮겨심었더랬습니다. 아쉽게도 뿌리내리지는 못했지만 한 동안 그 화분을 보며 넋 놓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바람난 처녀’, 조금 이해되시지요? 아쉽게도 이번엔‘얼레지사태’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혼자 걷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내 발밑에서 부서지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정중동의 자연을 섬세하게 느끼며 걸어갑니다. 방금, 순간적인 움직임이 시야 바깥에서 어른거렸습니다. 가만히 주위를 살핍니다. 꿩. 아닙니다. 뭔가가 다릅니다. 까투리 같은데 좀 둔합니다. 가만히 있습니다. 조심스레 카메라를 꺼내 줌을 당기는데 녀석은 자기가 잘 숨어 있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꼼짝도 않고 얼어있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능청스럽기도 합니다. 녀석과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한동안 즐기다가 발길을 돌립니다(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들꿩입니다). 조용히 혼자 걷지 않았으면 이런 만남은 없었을 테지요.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밭인 듯 밭 아닌 듯 얼기설기 갈아 놓은 땅을 지나니 계곡 물이 콸콸 흐릅니다. 이 물을 따라 내려가면 오남저수지겠지요. 저는 올라갑니다. 팔현계곡은 처음인데 역시 야생화로 유명하긴 한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다들 대포 같은 카메라를 둘러메고 꽃을 찾아다닙니다. 아침에 보니 자동카메라는 충전이 안 된 상태라 먼지 쌓인 DSLR을 꺼내 들고 왔는데요(완전 보급형에 건전지 타입), 저 이거 아녔으면 많이 부끄러울 뻔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무지막지한 카메라를 만납니다. 탐조하시는 분이군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새가 있습니다. 곤줄박이. 입에 깃털을 물고 왔다갔다 부지런합니다. 새 집 공사가 한창인가 봅니다. 따뜻한 햇볕, 평화로운 일상, 행복한 저입니다.
띄엄띄엄 앉은부채가 파랗게 돋아나 있습니다. 다 자라면 잎이 부채처럼 커서라고도 하고, 그 꽃이(정확하게는 불염포라고 합니다) 부처님 같아서 ‘앉은부처’라고 부르던 것이 앉은부채로 되었다고도 합니다. 펄럭이는 잎을 들춰서 안쪽의 꽃을 보면 정말 감실 속의 부처님 같답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등산하다 파란 앉은부채의 잎을 보면 청량한 바람이 마음에 부는 듯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부채라는 이름에서 연상된 느낌인 모양입니다. 꽃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이름이 궁금해집니다. 당연합니다. 처음엔 네이버로 찾아보다, 책을 빌려보고, 도감을 사고 그렇게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한창때는 식물 공부를 무공 수련하듯이 했습니다. 산에 가면 계속 땅만 보고 다녔고 꽃 지고 잎 떨군 겨울이면 나무 둥치만 살피면서 수피(樹皮)의 특징으로 나무 이름 맞추기 놀이를 혼자 즐겼지요. 조금씩 조금씩 자연을 알게 되면서 예전에는 선으로만 존재했던 송신소길이 3차원의 생명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빅뱅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나한테 인식되는 공간만이 나의 세계입니다. 저의 세계가 그만큼 커진 것입니다.
물가 바위에 금괭이눈이 빼곡히 박혀있습니다. 파란 잎 위에 노란 꽃이 구슬처럼 데굴거립니다. 빼꼼히 나를 올려다보는 듯한 고양이 눈이 앙증맞습니다. 아시겠지요? 그래서 ‘금괭이눈’입니다. 예의 그 대포 카메라가 모인 곳을 저도 기웃거려 봅니다. 바람꽃입니다. 아마도 꿩의바람꽃일 텐데 뭘 그리 열심히 찍으시는지. “야~ 너무 떨려서 못 찍겠다” 바람에 한들한들 떨려서 사진의 포커스를 못 맞추겠다는 말입니다. 옆의 친구분이 한 말씀 하십니다. “흐흐~ 바람꽃은 떨려야 바람꽃이지” 그렇군요. 정말 그렇군요. 바람꽃은 그래서 바람꽃이었던 것입니다. 업된 기분에 저도 슬쩍 말 붙여봅니다. “꿩의바람꽃은 저 위쪽에 많이 있어요. 저쪽엔 만주바람꽃도 있고요”하니, 아저씨가 입술에 손가락을 세우며 말합니다. “얘 앞에서 그런 얘기하면 안 되지” 아, 이건 감동입니다. 오늘도 한 수 배웠습니다.
계곡에 사람들이 잔뜩 몰렸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갔던 ‘동래식물원’ 사진대회가 떠오릅니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게 모델이 아니라 꽃이란 것만 다릅니다. 열정은 똑같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추억으로 행복감이 나른하게 번집니다. 처녀치마였군요. 한두 포기가 아닙니다. 몰려들 만합니다. 잎이 추욱 늘어진 게 딱 치맛자락입니다. 꽃은 분홍으로 부추꽃을 닮았습니다. 오랜만에 보니 더 예쁩니다. 요즘 제가 산행에 게을러서 보는 꽃마다 다 반갑군요.
시커먼 고로쇠 파이프를 따라 걷습니다. 다람쥐가 통통 튀어 다닙니다. 2마리, 아니 3마립니다. 다람쥐 마을에 도착한 기분이네요. 재빨라서 찍을 수는 없습니다. “녀석들”하며 한참을 바라봅니다. 조카랑 왔으면 참 좋아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듭니다. 여기는 미치광이풀이 이제야 꽃망울을 밀어 올리고 있네요. 고도를 점점 높일수록 미치광이풀은 그에 맞춰 점점 작아지네요. 이대로 계속 올라가면 미치광이도 계속 오그라들어 땅속으로 들어가 버릴 기세입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기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여행은 시간여행입니다. 중국 윈난성의 시골 마을은 1970년대 우리나라 어느 시골 마을 같았고, 학생 때 본 도쿄는 아톰이라도 날아다닐 듯한 미래도시였습니다. 여행은 공간의 이동이면서 시간의 이동입니다. 다른 시간대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여행은 생물학적으로 제한된 수명이라는 시간의 감옥을 탈출하는 행위입니다. 제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고로쇠 파이프가 튜브로 바뀌면서 낙엽 위를 종횡무진 달립니다. 고로쇠나무 양 옆구리에 튜브를 꽂아 놓은 모양이 청진기를 끼고 있는 의사 선생님 같습니다. 완만한 경사지에 노루귀와 복수초가 보입니다. 제가 정말 절묘한 때 왔군요. 지금쯤이면 얘들은 다 졌어야 하는데 양지바른 언덕에 무리 지어 핀 모습이 마냥 평화롭습니다. 노루귀는 꽃대의 솜털이 참 귀엽고 좋습니다. 전 특히 노루귀의 뒤태를 좋아합니다. 숨 막힐 듯한 뒤태지요. 청노루귀, 백노루귀 다 있습니다. 오늘 정말 눈이 호강입니다. 그리고 복수초.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福壽초입니다. 봄의 전령사라고 하는, 대표적인 봄꽃입니다. 파라볼라 안테나처럼 생긴 꽃잎이 태양빛을 반사해서 안 그래도 노란 꽃이 눈이 부시게 아롱거립니다. ‘자체 발광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으스대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저 안테나형 꽃잎이 태양광을 집광해서 꽃 중심의 온도는 주위보다 2~3도 높다고 합니다. 그 열로 쌓인 눈을 녹이고 꽃대를 밀어 올리는 것입니다. 처음 꽃 공부할 적에 이 녀석이 보고 싶어 겨우내 끙끙 않다가 2월에 홍릉수목원으로 달려가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돌핀샘에 도착합니다. 네이버 지도에는 돌판샘이라고 나오는데 돌핀샘이 맞습니다. ‘돌핀산악회’가 이 샘터를 단장하고 돌핀샘이라고 이름 붙였답니다. 한쪽에는 약물바위샘이라고도 적혀 있습니다. 청딱따구리 맑은소리가 “쿄쿄쿄쿄”하고 들립니다. 시원하게 한 바가지 들이키고 앉아 다리쉼을 합니다. 크라운 산도도 두 개 맛나게 먹고, 오렌지도 까서 먹습니다. 12시가 넘었네요. 돌핀샘에서 정상은 20분 정도의 거리지만 가파르고 중간중간 바윗길도 있어 제법 헉헉댑니다. 이른 봄엔 아직 얼음으로 미끄러지기 쉬우니 조심하셔야 합니다(조카 데리고 쩔쩔맸던 기억이). 능선에 오르니 탁 터진 풍광이 시원합니다. ‘천마산’ 비석이 굳건히 서 있습니다. 음, 812M나 되는군요. 天摩山, “손이 석 자만 더 길었어도 하늘을 만질 수 있겠다”라고 이성계가 그랬다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지요. 저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습니다. 능선길 옆으로 노랑제비꽃이 줄줄이 피었습니다. 노랑제비들이 “오늘 수고했다”고, “담에 또 보자”고 길옆에 도열해서 손 흔들어 주는 느낌입니다. 역시 봄의 색은 노랑입니다. 개나리가 그렇고 복수초가 그렇고. 문득 얼마 전 결혼해서 남양주로 이사한 친구가 생각나네요. 노란 병아리 같은 새댁. 전화해서 커피 한잔 마시고 싶어집니다. 그 친구에게 이 봄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내려가면, 진달래 한 가지만 살짝 꺾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