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주호 EBS IT운영부 선임
어느덧 날씨가 쌀쌀해지다 보니 야외에서 활동하기를 점점 망설이게 되네요.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영화관으로 자주 발길을 옮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가을의 영화 개봉 소식을 꼼꼼히 챙기신 분도 계실 것 같군요. 하지만 두 아이를 가진 아빠로서 영화는 이미 제 삶에서 사라진지 오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과거에 봤던 명화들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용보다는 오히려 음악이 주로 생각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음악영화나 음악가를 소재로 하는 영화들이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클래식 음악의 범주를 생각해보면, 모차르트의 삶을 그린 영원한 고전 ‘아마데우스’(1985), 카스트라토(거세한 남성 소프라노) 파리넬리의 삶을 그린 ‘파리넬리’(1995), 유대계 폴란드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이 겪은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를 소재로 한 ‘피아니스트’(2003), 자폐 피아니스트 데이빗 헬프갓을 소재로 한 ‘샤인’(1997) 등 클래식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영화를 아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생트-콜롱브에게 비올을 배우던 마랭 마래의 젊은 시절을 그린 ‘세상의 모든 아침’(1992), 태양왕 루이 14세와 그의 음악가 장 밥티스트 륄리의 관계를 담은 영화 ‘왕의 춤’(2001), 스승과 제자의 육체적 욕망을 담은 ‘라 피아니스트’(2001) 등이 기억나는군요. 이후에도 많이 있겠습니다만 최근에 영화를 거의 보지 못해서 그만…
클래식 작곡가들이 영화음악을 담당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사실 20세기 초의 음악가들은 영화음악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관객이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뿐더러, 영상에 부수적인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명의 젊은 음악가들이 돈을 벌기 위해 영화음악을 만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콘서트장과 오페라극장에서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바꾸면서 (특히 미국의) 거장들도 생계 걱정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상급 작곡가들이 점차 영화음악에 참여하게 되었고, 20세기 중반이 되면 영화음악의 수준은 급격히 올라가게 됩니다. 이에 따라 영화음악이 엄연한 예술 장르로 인정받게 되죠. 20세기 후반이 되면 영화음악과 클래식을 겸업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되고, 반대로 영화음악 작곡가들이 클래식 음악을 작곡하는 경우도 많아집니다. 이렇게 뛰어난 음악가들이 참여한 영화들을 보다 보면 영화를 보다가도 나도 모르게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나중에는 음악이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이죠. 이번 글은 바로 이러한 영화음악을 다루려고 합니다.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 *1937)
미국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미니멀리즘 음악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이란 가장 기본적인 요소만으로 구성하여 그 본질을 탐구하는 사조입니다. 회화와 조각, 무대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서 그 영향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음악에서는 어떻게 미니멀리즘이 구현될 수 있을까요? 작곡가마다 그 모습은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기본적인 삼화음과 단순한 선율, 단편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글래스는 이러한 스타일의 음악을 작곡했으면서도 ‘본질’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반복 구조의 음악’이라고 표현했고, 특정 감정을 강하게 어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나리오를 가진 작품이 많고, 또한 시각예술과 매우 잘 어울렸죠. 그가 영화와 오페라에 많은 작품을 쓴 것은 이러한 연관이 있습니다. 본인도 오페라의 잇따른 성공으로 전업 작곡가가 될 수 있었으니, 이에 대한 애착이 클 수밖에 없겠죠.
글래스는 영화음악 작업을 할 때 영상과 긴밀한 관계를 갖도록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습니다. 즉, 음악과 영상이 동시에 기획되었던 것이죠, 갓프리 레지오 감독의 ‘캇시 삼부작’, 즉 ‘코야니스캇시’(균형 잃은 삶, 1982), ‘포와캇시’(변화 중인 삶, 1988), ‘나코이캇시’(전쟁 같은 삶, 2002)가 특히 그러한 경우입니다. 이 영화들은 특정 배우나 대사 없이 연출된 영상이나 실제 사건들의 영상을 엮은 다큐멘터리로, 자연과 멀어지고 인간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삶을 서사적인 스토리 없이 이미지화하여 보여주는데요, 레지오 감독은 제작 과정에서 글래스의 음악이 가진 리듬에 맞추어 연출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달라이 라마를 그린 ‘쿤둔’(1997)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이 영화의 영상은 글래스의 음악 없이 홀로 설 수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글래스의 영화음악은 영상과 상호 연관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는 ‘트루먼 쇼’(1998), ‘디 아워스’(2002), ‘스토커’(2013), ‘판타스틱 4’(2015) 등일 것입니다. “나 이 영화 봤는데!” 하시는 것도 있을 것 같군요. 또한 ‘드라큘라’(1931)와 같은 옛 영화에 새로 음악을 쓰기도 하고, 특이한 경우로서 장 콕토 감독의 ‘미녀와 야수’(1946)의 영화를 소리 없이 상영하면서 이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영화오페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상당한 양의 영화와 TV드라마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감상 추천으로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와 박찬욱 감독, 니콜 키드먼 주연의 ‘스토커’를 준비했습니다. ‘트루먼 쇼’는 스튜디오가 세상의 전부였던 트루먼이 사랑을 찾아 목숨을 건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죠. 이 영화에 사용된 음악 중에 트루먼이 잠들 때 연주되는 피아노 음악 <Truman Sleeps>는 특히 유명합니다. 네 개의 삼화음과 균일한 리듬으로 이루어진 네 마디의 베이스 반주 위에 감성적인 선율이 올려져있는 단순하고 짧은 음악이죠. 방송 주조종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필립 글래스의 모습도 잠깐 비춥니다. (트루먼 쇼 : youtu.be/8x_fo6rriUE?t=56m45s) ‘스토커’는 엄마와 딸과 삼촌 사이의 미묘한 애정 관계를 그린 스릴러물이죠. 딸이 혼자 피아노를 치는 중 상상 속의 삼촌이 나타나 육체적 애정을 느끼면서 관능적으로 연주하다가 다시 홀로 돌아와 피아노 연주를 마치는 피아노 장면이 있습니다. 반복을 통해 스럴러다운 불안한 감정이 더욱 증폭되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스토커 : youtu.be/z2ET4iw_Jp4?t=35m35s)
‘트루먼 쇼’의 한 장면
마이클 나이먼(Michael Nyman : *1944)
앞에서 미니멀리즘 음악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렸는데요, 미니멀리즘 음악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영국 작곡가 마이클 나이먼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평론가로도 활발히 활동했었는데요, 1968년 영국의 작곡가 코넬리우스 카듀(Cornelius Cardew : 1936~1981)에 대해 설명하면서 음악에 미니멀리즘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나이먼 자신도 반복구조의 음악을 쓰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미니멀리즘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그도 영화음악을 작곡했습니다만, 글래스처럼 할리우드 영화와 자주 작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가 많습니다. 그나마 국내에 알려진 영화는 ‘피아노’(1993)와 ‘가타카’(1997)를 들 수 있겠군요. 영화 애호가라면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1982)을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감상 추천으로 ‘피아노’와 ‘가타카’를 준비했습니다. ‘피아노’는 이 영화에 사용된 음악을 모아 <The Piano Concerto>(1993)라는 음악회용 곡을 만들 정도로 나이먼의 애착을 갖고 있던 작품이었습니다. 해변 장면을 보시면서 피아노 음악을 들어보세요. (피아노 : youtu.be/rfpHj1lC5Yk) ‘가타카’는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 검사를 통해 진로가 결정되는 미래 사회를 그린 영화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신분을 속이고 우주비행사가 되어 꿈을 이루죠. 사기꾼의 행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선천적인 결점을 극복하는 인간의 노력에 감상 초점을 맞춰야겠죠? 주인공이 우주비행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을 골라보았습니다. (가타카 : youtu.be/8ccvv9NhloI)
존 코릴리아노(John Corigliano : *1938)
존 코릴리아노는 1991년에 <교향곡 1번>(1988)으로 그로마이어상을, 2001년에 <교향곡 2번>(2000)으로 퓰리처상을, 그리고 그래미상을 다섯 번이나 받는 등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저명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문화의 용광로, 미국의 작곡가답게 자신의 음악에 다양한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 곡에서도 음악적 시나리오에 따라 여러 스타일이 나타나기도 하죠.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매우 극적이며 탄탄한 음악적 내러티브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현대음악 애호가가 아닌 일반 대중도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더러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림 형제의 동화를 그대로 음악으로 옮긴 플루트 협주곡 <피리부는 사나이 환상곡>(Pied Piper Fantasy : 1982)과 같은 작품 말이죠. 이 곡에 대해서는 5월호 ‘동화’ 편에서 설명해드렸으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영화 ‘레드 바이올린’(1999)의 음악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하고서였습니다. 그는 영화음악을 그다지 많이 쓰지 않았습니다. ‘레드 바이올린’을 제외하고는 ‘Altered States’(1980)와 알 파치노 주연의 ‘Revolution’(1985)이 전부입니다. 모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죠. ‘레드 바이올린’은 붉은 염료가 칠해진 한 바이올린이 19세기 기교파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집시 바이올리니스트, 문화혁명 시대의 중국 바이올리니스트 등으로 전해지면서 다양한 시대, 다양한 나라, 다양한 민족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조망하는 영화입니다. 코릴리아노는 나이먼처럼 이 영화에 사용된 영화음악을 편집하여 <레드 바이올린 : 샤콘>(1997), <레드 바이올린 모음곡>(1999), <레드 바이올린 광시곡>(1999), <레드 바이올린 협주곡>(2003)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클래식 음악회를 위한 작품이지만 근본이 영화음악이라 매우 극적이고 화려하며 낭만적입니다. 감상 추천은 협주곡으로 준비했습니다. (레드 바이올린 : youtu.be/Mc_-OlC1JQs)
탄둔(Tan Dun 譚盾 : *1957)
중국 출신 작곡가들은 자국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아서, 음악에도 중국 전통 음악적 특징을 전면에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후나 비파와 같은 중국 전통악기를 함께 사용하거나, 중국 전통 음계를 도입하거나, 농현과 활주 주법을 강조하는 등의 특징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우리에게는 중국색이 짙다는 느낌을 받지만, 서양에서는 이국적인 특색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탄둔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분명한 중국의 색채를 드러내고 있죠. 그는 덴젤 워싱턴 주연의 ‘Fallen’(1998)과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위해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그가 영화음악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중국 사극을 통해서였습니다. 바로 주윤발 주연의 ‘와호장룡’(2000), 이연걸 주연의 ‘영웅’(2002), 장쯔이 주연의 ‘야연’(2010)이었죠. 그런데 이 세 영화는 모두 장쯔이가 여우주연으로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연일까요? 아니면 탄둔이 장쯔이의 팬이어서일까요?
탄둔도 앞서 나이먼과 코릴리아노처럼 영화음악을 모아 클래식 음악회용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와호장룡’은 본래 얼후와 관현악을 위한 <와호장룡 협주곡>(2000)으로 만들었지만 서양에서 얼후 연주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첼로 협주곡으로도 연주할 수 있도록 되어 있구요, ‘영웅’은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영웅 협주곡>(2010), ‘야연’은 피아노 협주곡 <야연>(2010)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이 세 곡들은 작년 11월 초에 탄둔이 직접 내한하여 시울시향과 함께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했던 적이 있죠. 음악과 어울리도록 편집된 영화 장면들을 상영하면서 연주되어 매우 색다른 경험을 주었습니다. 감상 추천으로 <와호 협주곡> 첼로 버전을 준비했습니다. 영화를 보지 못하신 분이라도 중국 무협 영화를 상상하시면서 보시면 색다른 음악 감상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유튜브에서 검색하시면 국악기의 해금과 유사한 얼후로 연주한 버전도 보실 수 있습니다. (감상 추천 : youtu.be/dr2Qv4tu_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