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천의 손자병법 인문학 : 한니발이 문 앞에 와 있다

노병천의 손자병법 인문학 : 한니발이 문 앞에 와 있다

한니발이 문 앞에 와 있다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 ― 『손자(孫子) 시계 제1편』

“한니발이 문 앞에 와 있다!”(Hannibal ad portas) 어린아이가 울면 로마의 어머니는 이 말을 했다. 얼마나 로마사람들이 한니발을 무서운 존재로 뇌리에 박혀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은 한니발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 사나이는 약관의 나이에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냈다. 조국의 도움도 없이 적국과 알려지지 않은 종족들을 강타했고 승리했다. 아무도 넘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내려가 정의를 위해 전장을 휩쓸었다. 이탈리아를 15년간이나 지배하고 통치했으며, 몰락하기 전까지 공포에 떠는 로마를 여러 번 가격했다.” 한니발에게서 영감을 받았던 나폴레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다비드의 백마 타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그림의 바위에 한니발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의 조각상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의 조각상

칸나에 전투는 어떤 전투인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16년에 이탈리아 중부 아프리아 지방의 칸나에 평원에서 로마 공화정 군과 카르타고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보병 9만 명과 기병 1만 2,000명, 그리고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다.

6개월 후, 이들 중에 4분의 1도 안 되는 병력만이 추위에 지치고 허기로 탈진한 채로 북부 이탈리아 평원에 도착했다. 알프스를 가로지른 한니발의 행군은 인류의 전쟁사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업적 가운데 하나였다.

알프스를 넘고 있는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
알프스를 넘고 있는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

기원전 216년 8월 2일 칸나에 평원에 역사적인 날이 밝았다. 로마군의 지휘관은 신중한 성격의 파울루스와 성급한 성격의 바로였다. 로마군은 1만의 병력을 야영지 경비를 위해 남기고, 남은 7만여 명을 전장에 배치했다. 로마군은 밀집대형으로 최초에 포위를 계획했으나 불가능함을 알고 수적우세를 이용하여 적을 압도할 목적으로 모든 전열을 강화했다. 로마군이 바로의 지휘권 하에 있음을 간파한 한니발은 바로의 성급한 성격을 이용하여 대담한 포위계획을 수립했다. 중앙부로 적의 주력을 자석처럼 끌어온 뒤에 주머니 안으로 들어온 적을 강화된 양익으로 활처럼 포위하여, 측방과 후방에서 기병으로 타격을 가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창과 투창과 돌들이 빠르게 날아다니면서 양쪽 부대의 경보병들이 서전을 열었다. 파울루스는 전투가 시작될 무렵 한니발의 투석병이 던진 돌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나팔수들의 나팔 소리를 신호로 로마 보병대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투창들이 한니발군의 머리 위로 던져졌고 한니발군은 무수히 죽어갔다. 승리에 광분한 바로는 전열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제2전열의 각 소대를 제1전열의 간격 사이로 밀어 넣음으로써 병사들의 기동성을 제한했다. 한니발은 작전계획에 따라 중앙군을 서서히 뒤로 물러서게 했는데 바로는 이를 보고 더욱 광분해서 제3전열과 기타 경보병까지도 제1전열에 투입했다. 이때 겁을 먹은 한니발의 중앙부 병사의 일부가 칼과 방패를 던지고 도망가려 하자 한니발은 진두에 서서 독전해서 다시 질서를 되찾았다.

위기였다! 그러나 한니발의 솔선수범이 이것을 막았다. 만약 이때 중앙부가 무너졌다면 칸나에의 전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뒤로 빠지는 한니발군을 따라 들어갔던 로마군은 이제 완전히 기동성이 마비되었다. 결정적 시기에 한니발은 중앙군의 퇴각을 중지시키고 동시에 양익군을 기동, 바로군의 양측을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명령했다. 양익군은 가장 강력한 군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때 한니발의 좌익 기병대가 멀리 돌아 바로의 보병대 후방에 나타났다. 중앙과 양익, 그리고 후방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은 로마군단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병사들 대다수가 칼조차 제대로 빼지 못하는 밀착 상태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이 상황을 역사학자 폴리비우스는 “바깥쪽의 병사들이 계속해서 쓰러지자 살아있는 병사들은 점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떼 지어 모인 그들은 결국 있었던 그 자리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는 기병 50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도망갔다.
칸나에 벌판에는 로마군 보병 4만 7천여 명과 기병 2,700명이 죽어 엎어졌다. 전사자 중에는 파울루스가 포함되어 있었고, 고위 간부 29명, 의원급 주요 인사 80명 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니발은 여기에 더해 1만 9,300명의 포로를 획득했다. 한니발 측의 전사자는 8,0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전투를 두고 전사학자들은 섬멸전이라 불렀다.

한니발의 침입로를 보여주는 지도
한니발의 침입로를 보여주는 지도

손자병법 시계(始計) 제1편에 보면 조직의 수준을 파악하는 다섯 가지 기준이 나온다. 오사(五事)라고 부르는 이 기준은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으로 나타나는데, 도(道)는 조직의 단결력을, 천(天)은 기상적 요소를, 지(地)는 지리적 요소를, 장(將)은 리더의 자질을, 법(法)은 조직의 시스템적 요소를 말한다. 한니발은 도(道)의 기준에서 보면 완벽에 가까운 리더십을 발휘했다. 출신도 제각각인 오합지졸의 군대를 특유의 인간적인 매력과 리더십으로 이들을 이끌었다. 알프스를 넘을 때에도, 혹독한 행군 중에서도, 그리고 당시 공포의 무적 로마군단과 싸울 때에도 그와 함께 한 사람들 중의 한 명도 그를 배반하고 도망한 사람이 없었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용병들이 대부분인 한니발의 부하들이 어떻게 이런 충성을 할 수 있었는가? 한니발은 지휘관이었지만 일반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이 춥고 배고플 때 자신도 역시 추위에 떨고 굶주리며 땅바닥에 외투를 깔고 잠을 잤다. 고대문서에서 발견된 한니발의 모습은 이렇다. “어떠한 고통도 그의 육체를 지치게 하지 못했고, 용기를 꺾지 못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창고 속이든 어디든 일에 열중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군복을 입고 보초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리고 당시의 카르타고군은 한니발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그가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한 이상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였다. 사실 군인에게서 이런 믿음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회사에서도 상사의 말만 들으면 항상 이익만 생긴다고 했을 때 그 상사의 말을 듣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를 구상하면서 지(地)의 요소에 대해서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대규모 포위작전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역할을 할 기병이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평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택한 장소가 바로 칸나에 평원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로마군을 의도적으로 유인했던 것이다. 법(法)의 요소에 있어서는 카르타고보다는 로마의 시스템이 월등했다. 한니발이 로마를 정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카르타고에는 한니발 한 사람만이 존재했지만 로마에는 열 명의 한니발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재풀이 항상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재를 시스템으로 관리한 로마는 그 후로도 그 위력을 발휘했고 결국에는 카르타고를 잿더미로 만들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道 天 地 將 法
도 천 지 장 법
단결, 기상, 지리, 리더, 시스템

패전한 바로는 로마원로원에 의해 벌을 받지 않았다. 본래 로마는 용감히 싸우다 진 패장에 대해서 개별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 전통이 있다. 단순히 관용 때문은 아니다. 능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할 때는 스스로 물러가게 만든다. 그리고 절치부심 노력하는 자에게는 그다음에 설욕할 기회를 준다. 1차 카르타고 전쟁에서 패한 스키피오는 비록 패장이었지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2차 카르타고 전쟁이 발생했을 때 다시 지휘관으로 나가서 1차 패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승리했다. 현대적 경영에서 보면, 리스크관리 기법인 손실데이터 관리를 했던 것이다. 로마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로마의 시스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로마인의 ‘개방성’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로마인이 후세에 남긴 진정한 유산은 여러 유적들이 아니라 시스템과 개방성이다. 아이가 울면 “한니발이 문 앞에 와 있다.”고 외쳤을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던 한니발. 그러나 그는 시스템에서 졌다. 위험한 기업은 최고경영자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는 기업이다. 그 한사람이 없으면 기업이 휘청거리는 시스템은 최악의 조직이다. 우리 회사는 이런 점에서 어떤가? 사장 한 사람에게 회사가 달려 있지는 않은가? 어느 특정 부장, 과장 한 사람에게 회사가 달려 있지는 않은가? 한 명의 한니발이 아니라 여러 명의 한니발을 가지는 회사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저력 있는 회사다.

여러 명의 한니발을 가지는 회사가 되자.

道      天      地      將      法
길 도 하늘 천 따 지 장수 장 법 법

그림 및 사진 참조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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