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의 시대 – ①

큐레이션의 시대 –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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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화를 보면 흙을 반죽하여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중국 고대 신화에서의 여와, 수메르 신화에서의 엔키 등 창조신들이 진흙을 반죽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창세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잘 아시는 대로입니다.
진흙과 같이 가치 없는 것에서 인간처럼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영역, 즉 神의 초월성을 드러내는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사례이지요.
큐레이션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큐레이션의 핵심이, 기존에 존재하는 가치가 없거나 저평가된 가치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월등한 가치를 가진 제3의 존재로 재탄생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큐레이션의 정의
최근에 주위에서 큐레이션이라는 얘기를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최근에 정책기획 파트에서 일하게 되면서 큐레이션을 부쩍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소셜 큐레이션이 뜨고 있다, 콘텐트 큐레이션이 중요하다, 큐레이션은 빅데이터에 기반해야 한다.”는 얘기를 흔히 듣게 됩니다.

큐레이션은 원래 미술계 등 예술파트에서 학예사(學藝士)라고도 불리는 큐레이터(curator)에서 나온 말입니다.
큐레이터는 자료의 관리자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용어로써, 통상 “작품의 수집과 보존, 그리고 전시 기술과 더불어 작품의 실물 및 현상에 관련된 도서나 문헌 등에서부터 녹음, 녹화에 이르는 모든 자료에 관한 조사를 토대로 이를 수집, 구입, 교환, 제작, 수여, 기탁과 같은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전시, 보존, 복원, 보호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출처 : 세계미술용어사전, 네이버지식백과Beta에서 재인용)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큐레이터가 예술작품을 직접 창작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왜 중요한지는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예술의전당’에서 주최하여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아래의 특별 전시회를 기획, 관리, 운영하는 사람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시크릿뮤지엄’ 소개]출처 : 행사 홈페이지(http://www.secretmuseum.co.kr/about/exhibit)

 

다만, 단순히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역할은 아닙니다.
자신이 생각한 특정한 주제와 의미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너무나 많이 접해서 이제는 식상해진)예술작품들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조합으로 소개하고, 그 과정에서 관객이 예상하지 못했거나 감탄할 수밖에 없는 해석을 부여하는 것이 주 업무이지요.
직접 관람하지 않아 장담하기는 힘들지만, ‘시크릿뮤지엄’의 큐레이터는 프랑스 명화 여러 점을 8개의 카테고리로 나누고, 그 카테고리별 섹션에서 자신이 선별한 내용과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면 선, 색, 빛, 그림자, 시간, 원근법, 마티에르, 감정 등 8개의 기준에 따라 공간을 분할한 것을 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뭔가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 [‘시크릿뮤지엄’ 전시 구성 안내]출처 : 행사 홈페이지(http://www.secretmuseum.co.kr/center/setup)

 

미디어의 발달과 콘텐트산업의 확장에 따라 큐레이터의 개념은 확장을 거듭합니다.
미술관에만 있을 것 같은 큐레이터가 방송사에도, 신문사에도, 음반사에도 존재하게 됩니다.
즉, 다수의 정보(명화)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선별적으로 취합하여 특정한 미디어를 통해 일반에게 제공하는 자가 큐레이터가 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큐레이터가 일반에게 제공하는 정보의 취사선택, 가공의 모든 과정과 그 결과물을 큐레이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큐레이션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다양하게 정의한 바 있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선호하는 정의는, “정보를 수집하고 선별하며,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공유하는 것으로서, 수집되기 전에는 광대한 노이즈의 바다에 표류하고 있던 단편적인 정보들이 큐레이터에 의해 끌어올려져 의미를 부여받고 새로운 가치로 빛나기 시작한다.”[사사키 도시나오(佐々木俊尚), “큐레이션의 시대”]는 것입니다.
큐레이션의 핵심인 수집/선별(발굴), 의미부여(새로운 가치 생성), 공유(유통) 개념이 모두 포함된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부연하자면, 큐레이션은 가치가 없거나 혹은 적다고 판단되는 콘텐트(정보)가 새로운 기준하에서 의미를 부여받아 월등한 가치의 새로운 콘텐트로 재탄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용자를 감동시키는 신의 한 수를 두는 사람이 큐레이터인 것이지요.
다만, 미술계의 큐레이션보다 콘텐트계의 큐레이션이 상업적 반향에 훨씬 의존적이라는 점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큐레이션의 확장 : 큐레이션과 콘텐트의 만남
이제 큐레이션의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회 차에 보다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큐레이션의 사례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고, 우리 주변에 매우 오래전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흔히들 큐레이션이라고 하면, 소셜 큐레이션이라고 하여 여러 사진이나 가십거리를 올리는 해외 사이트를 연상하게 됩니다. 핀터레스트(pinterest.com)나 포스트시크릿(postsecret.com)같은 사이트가 대표적입니다. 긴 뉴스를 짧게 압축해주는 간단한 기능만으로 야후!에 거액에 인수된 ‘썸리’(Summly)도 주요한 예입니다.
이러한 소셜 큐레이션 사이트들은 웹상에 혼재되어 있는 무수한 정보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취사선택하여, 나(고객)의 성향과 같거나 유사한 사람들이 쉽고 빠르게 공유하여 소비토록 하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 [대표적인 큐레이션 서비스인 “핀터레스트”와 “플립보드”](출처 : 각사 홈페이지)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IT기업들보다 훨씬 이전부터 큐레이션이 우리 곁에 와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CBS 음악FM(이하 ‘CBS FM’)이 그 좋은 예입니다. CBS FM이 어떻게 큐레이션의 전형적인 사례냐고 반문하실 수 있겠으나, 앞서 말씀드렸던 큐레이션의 정의를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잘 아시다시피 음악 FM에는 DJ와 PD(혹은 둘을 겸하는 사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DJ와 PD는 우리가 기존에 익히 알고 있는 노래들을 선곡합니다. 심상히 듣던 노래가 어느 순간 마음을 울리는 감동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기억하신다면, 그때 DJ가 행한 마법이 바로 큐레이션이라는데 아마 동의하실 겁니다. 특히 연예인의 신변잡기식 토크 일색인 일반적인 라디오 방송과 CBS FM이 차별되는 그 지점이 큐레이터가 기획한 비장의 한 수라는 점도!

이때,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노래와 DJ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DJ는 노래(콘텐트)의 창작에 관여하지 않았고, 다만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에 그 노래를 틀었을(큐레이션) 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큐레이터는 스스로 창작하지 않습니다. 만들어진 콘텐트를 자신의 기준과 방식으로 큐레이션할 뿐이지요. 그리고 청취자는 노래가 아니라 방송프로그램을 듣는(소비하는) 것이지요. 덕분에 방송사는 방송프로그램 광고로 수익을 얻게 되고, 그 수익은 다시 방송 제작에 투입되는 선순환 구조가 됩니다.

물론 청취자가 방송사라는 큐레이터를 신뢰하지 않아서 처음부터 주파수를 맞추지 않았다면 그 이후의 일은 없었을 테니, 큐레이터에 대한 신뢰도도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큐레이션의 달인이라 하더라도 대중이 알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면, 큐레이션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겠지요. 현재의 큐레이션은 상업적 성공이 부가되어야만 성공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큐레이터와 대중 간의 상호 커뮤니케이션과 피드백 역시 큐레이션의 필수 요소입니다.

이베이나 옥션 같은 쇼핑사이트에서 내가 산 물건과 유사한 아이템을 추천하거나, 나와 비슷한 구입유형을 보인 사람들이 구입한 물건들을 제안하는 것도 큐레이션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콘텐트 큐레이션에 마음이 끌리는 편입니다. 신변잡기적인 구독 서비스에 기반한 핀터레스트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싶네요.

큐레이션의 미래
큐레이션이 각광을 받으면서 빅데이터(Big Data)도 같이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빅데이터는 이용자의 이용양태와 같이 어마어마하게 축적된 큰 규모의 데이터를 말하며, 과거에는 의미 없는 데이터의 집적에 불과하다고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ICT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용자의 패턴을 예측하는데 사용될 수 있게 되어 새로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최근 SKT가 자사 보유 빅데이터를 외부에 개방하겠다는(물론 개인정보 같은 부분은 제외) 의사를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 NHN과 빅데이터 사업 육성 등을 위해 MOU를 맺는 등 빅데이터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빅데이터는 큐레이션을 거쳐 새로운 가치로 재탄생할 예정입니다.
SKT와 NHN이 밝힌 바대로 SKT의 T맵 서비스와 NHN의 지도검색 서비스가 결합하는 경우를 가정하면, 적어도 내비게이션 업계의 지각변동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SKT 통신가입자의 생활양태(예컨대 멤버십 사용패턴)와 NHN의 음식점 추천 서비스가 제휴하는 등 보다 세부적인 부분에서 상호 보유하고 있는 빅데이터가 활용된다면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이 획기적으로 (그것이 올바른 방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변화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 [빅데이터 큐레이션](출처 : “기업의 新경쟁력, 빅데이터 큐레이션”, 삼성경제연구소,2013.4.10.)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이상 큐레이션을 잘 설명한 말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콘텐트를 큐레이션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가히 ‘21세기의 연금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핀터레스트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콘텐트를 제작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여러 이용자들이 모여들 수 있는 공간(플랫폼)을 제공하고, 관리와 배치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콘텐트를 제작한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하고도, 엄청난 유무형의 수익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대중이 믿을 만한 큐레이터의 등장과 그의 큐레이션을 고대하고, 핀터레스트 사례처럼 격렬하다고 할 정도로 호응하는 것은, 현대사회가 정보폭발의 시대이고, 대중이 과도한 정보 속에서 길을 잃은 상황임을 방증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통의 큐레이터인 방송사가 그간의 축적된 노하우와 압도적인 국민적 신뢰도에 기반하여 새로운 큐레이션을 진행한다면, 새로운 미디어들과의 경쟁에서 오히려 우위를 점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EBS의 큐레이션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겠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큐레이션 서비스의 실례를 살펴보고, 큐레이션이 방송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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