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함에 이르는 노트의 비밀 3회

탁월함에 이르는 노트의 비밀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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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이라는 화두가 한동안 퍼졌었다. 몰입이라는 책의 저자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몰입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의 사례를 들어 하나하나 풀고 있다. 이 몰입이라는 것은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박사가 쓴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책에 영향을 받았다. 사실 몰입상태라는 것의 원래 명칭은 ‘Flow State’이다. 평이한 우리말로 하자면 흐르는 상태다. 막힘없이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일을 할 때 일이 안 되는 것은 생각이 막히거나 여러 가지 잡다한 일 때문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칙센트미하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흐름의 상태를 만들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일로 생각이 막혀서 고만고만한 정도의 결과만 낸다고 주장한다.

 

흐르는 상태(Flow)에 도달하는 방식을 실제적으로 제시한 몰입이라는 책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이를 실천하여 즐거움을 느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요체는 한 가지 생각을 지속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기술인데, 이를 위해 생각의 요동을 정지시키기 위한 준비 작업을 요청한다. 이 중에는 일부러 느긋한 태도를 갖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러면서 한 가닥의 생각을 깊게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몰입의 상태가 되고, 그 상태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신기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일생에 이런 경험을 한두 번은 다들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원리로 유명한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몰입 순간을 그의 저서인 <부분과 전체>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는 박사학위논문은 유체역학의 난류유동에 관한 것이었지만, 당대의 석학 닐스 보어와 함께 저녁에는 양자역학을 스스로 탐구하고 있었다. 어느 가을 그는 고초열병이라는 심한 알레르기로 얼굴이 퉁퉁 부어 학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시골의 여관에 가서 며칠 요양을 하기로 했다. 갑자기 일상을 탈출하여 번잡함이 사라진 곳에서 그에게는 섬광같이 어쩌면 양자역학의 이론이 에너지 보존법칙을 만족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행렬방정식을 만들면서 이를 계산했다. 수학에 뛰어난 하이젠베르크는 그 방정식의 첫 항이 완벽하게 에너지를 보존하는 것을 보고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자꾸 계산이 틀려 모든 항이 에너지를 보존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새벽이 다되어서였다. 그는 완벽하게 역학체계를 구성하는 양자역학의 지배방정식을 유도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여관 뒤에 있는 헬골란트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산에 누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에게 일어난 이 잊지 못할 순간은 분명 몰입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 몰입은 사실 그의 이전 일상에서 계속되어온 수많은 노력이 물밑에 잠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솟아오른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얼마나 위대한 것들이 숨어있을까? 그것을 건져 올린 사람은 인류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고, 그대로 무의식에 묻어둔 사람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사실 우리는 모두 매우 위대한 것이다.

 

   
 

위대한 수학자 알리 푸앵카레의 경우는 이러한 입장을 더욱 지지한다. 그는 어떤 문제를 풀다가 도저히 풀리지 않아 포기를 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군대에 갔다. 어느 날 이동 명령을 받고 마차를 타려고 하는데, 발 받침을 딛는 순간 그 문제가 떠오르면서 뭔가 해결방안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동 중에 한가로이 그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고, 이내 잊어버렸다. 제대를 하고 학교로 돌아온 그는 어느 날 또 마차를 타려고 하다가 갑자기 그 문제의 답이 떠올랐다. 그는 이번에는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그 문제를 완전히 푼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이 일을 두고 잠재의식에서 문제를 풀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열심히 하루 종일 연구하는 대신에 오히려 잠재의식이 활동하도록 휴식을 더 많이 취했다고 한다. 그는 하루에 딱 네 시간 만 연구를 했고, 나머지 시간에 그를 보려면 테니스장에 가면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하루 네 시간은 잠재의식 속에서 풀린 문제를 꺼내는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나의 멘토이신 퍼듀대학교의 이시이 교수는 원자력발전소의 안전해석을 위한 방정식을 만들어낸 분으로 유명한데, 그분은 참 독특하게도 오후 5시 이후에는 절대로 전공분야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저녁 초대라도 하시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하나라도 더 배울 요량으로 전공 관련 질문을 하면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고는 이내 다른 주제를 이야기한다. 그의 주요 이야깃거리는 2차 세계대전이나, 사무라이 이야기이지만 절대로 과학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과학연구로 지친 자신의 두뇌를 쉬게 하려는 배려처럼 보였다.

 

다시 푸앵카레로 돌아가면 그의 연구노트는 바로 출판을 해도 될 만큼 정연했다는 것을 주목하고 싶다. 이것은 이시이 교수의 경우에도 그러했는데, 잠재의식의 헝클어진 내용을 정연하게 뽑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다들 특징이 글씨를 무척 천천히 쓴다는 것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말을 천천히 한다. 어눌하게 한다. 그럴수록 설득력은 배가된다. 아무리 좋은 말도 지나친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조잘조잘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은 진실성을 의심한다. 마찬가지로 글을 쓴다는 행동은 잠재의식에 말을 거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잠재의식은 너무 빨리 말을 걸면 이내 퉁명스러워지고, 이러저리 헝클어진 생각을 퍼내 주어 글이 막히게 만든다. 그러나 천천히 여유를 갖고 글을 쓰면 잠재의식은 친절하게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마음이 급할수록 종이를 펴고 글을 써라.

너무 마음이 산란하면

그냥 점만 계속 찍어도 좋다.

그러다 보면 잠재의식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이시이 교수님은 어느 날 내가 몹시 마음에 드셨는지, 자신의 비밀 서재에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연구노트를 보여주었다. 옅은 초록색의 알곤 국립연구소 시절의 연구노트에는 변함없이 정연한 글씨가 가득했다. 어떤 페이지에는 단어 하나만 쓰여 있기도 했고, 어떤 페이지에는 깨알 같은 손 계산이 가득했다. 나는 그 육필 연구노트에서 이 거장의 잠재의식을 들춰보는 환희를 맛보았다.

 

마음이 급할수록 종이를 펴고 글을 써라. 너무 마음이 산란하면 그냥 점만 계속 찍어도 좋다. 그러다가 섬광처럼 단어가 떠오르면 단어를 쓰고, 그림이 떠오르면 그림을 그려라. 그러다 보면 잠재의식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받아써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폭풍처럼 글을 토해내는 순간이 온다. 이것을 몰입이라고 부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몰입을 넘어 밀물모드(Surge mode)가 있음을 주시한다. 방금 말한 것처럼 속에서 터져 나오는 글쓰기는 흐름을 넘어 밀물이다. 사고의 쓰나미가 몰려나오는 것이다. 모차르트가 그러했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러했다. 모차르트의 작곡원고를 베껴 쓰는 것도 30년이 걸린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작곡은 몰입모드가 아닌 밀물모드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우리 안에 잠재된 무의식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무의식을 의식으로 꺼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노트하기를 강력 추천한다. 

 

<VOL.204 방송과기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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