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산 기행 : 호룡곡산(虎龍谷山)

한국의 명산 기행 : 호룡곡산(虎龍谷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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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0210 DSC00208호룡곡산을 아시나요? 호랑이와 용이 격전을 벌였다는 산입니다. 이름대로 크고 장엄한 산세를 자랑하며 첩첩산중 심심산골에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바로 서울 옆에 있습니다. 이젠 인천공항으로 잘 알려진 영종도 주변 무의도라는 아담한 섬의 주봉입니다. 예, 이번 산행은 너무 가까워서 ‘전철로 가는 섬 산행’입니다.

호룡곡산을 가려면 먼저 무의도를 가야 합니다. 무의도를 가려면 먼저 잠진도를 가야 하고, 잠진도를 가려면 먼저 영종도를 가야 하고… 후후, 놀라지 마세요. 2015년 현재, 잠진도까지는 육지화되었습니다. 잠진도 바로 앞이 용유역이고 주말엔 ‘바다열차’라고 해서 용유역까지 공항철도가 연장 운행된답니다. 1시간에 1대꼴로 운행하는 전철을 타고 용유역에 내리면 선착장이 있는 잠진도까진 걸어서 15분이면 됩니다. 바닷바람으로 빵빵하게 옷 풍선이 만들어지는 걸 보면서 휘적휘적 방파제길을 걷다 보면 무의도도 성큼성큼 눈앞으로 다가옵니다. 왼편으로 기세 좋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국사봉(호룡곡산은 국사봉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얼른 배표를 구입하고 입을 벌리고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룡1호에 올라탑니다.

DSC00197 DSC00205이번 산행은 회사 사람들과 같이하기로 했습니다만,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분들은 많고 이래저래 되는 분은 중계차 오디오 감독님 한 분. 멋쩍지만 선배랑 둘이 가게 됐습니다(남자 둘이 말이지요). 전철역에서 만나 배에 올랐습니다. 무의도가 처음이라는 선배답게 무의도 필수품을 모르십니다. 새우깡이죠. 한 봉지 뜯어 선배한테 들려줬더니 갈매기보다 선배가 더 신났습니다. 허공에 새우깡을 던져 올리면 우리 눈치만 보며 활강하던 갈매기들이 기가 막히게 낚아챕니다. 똥똥한 하얀 배에 짤막하게 매달린 노란 발, 급선회하는 날개 죽지의 깃털까지 선명하게 보입니다. 아이들이 환장하는 순간이지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쟤들은 진짜 새우를 먹어보긴 했을까?”(니들이 새우 맛을 알어?)

갈매기랑 놀다 무의도에 도착한 줄도 몰랐네요. 이미 차고 사람이고 다 내렸습니다. 조금만 더 넋 놓고 있었으면 다시 잠진도로 갈 뻔했습니다. 허둥허둥 배낭을 챙겨 들며 서로 얼굴 보고 웃습니다. 찰랑찰랑 부두를 때리는 바닷물을 뒤로하고 무의도라 쓰인 환영 아치를 통과합니다. 산행기점은 바로 정면에 있을 텐데, 있어야 하는데. 아, 여름의 끝자락이라 무성한 풀에 계단이 가려져 있네요. 체크 반바지를 시원하게 차려입은 선배가 먼저 발을 올리면서 오늘의 산행을 시작합니다.

DSC00211 DSC00215실미도녹음이 우거져 청명한 풀빛 그늘이 계속 이어집니다. 다행입니다. 오늘 햇볕이 만만찮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서어나무 숲을 지나니 성황당이 나옵니다. 1년 전에 왔을 때보다 울긋불긋 휘감긴 천 조각이 많이 줄었고 전체적으로 너저분해 보입니다. 아쉽습니다. 보존이랄까 가꿈이랄까 뭐 그런 배려가 아쉽습니다. 우리가 우리 전통에 조금 더 애정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저 으리으리하게 퍼져나간 서어나무를 보며 절로 영험함을 느꼈을 우리 조상들을 떠올려봅니다. 저 돌탑을 보며 그네들이 차곡차곡 돌을 쌓듯 저마다의 기원을 쌓아올리던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렇게 쌓은 기원의 돌탑이 비바람 폭풍에도 굳건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당신들의 희망도 더욱 단단하게 영글어갔겠지요. 쇠락한 성황당을 보며 오늘의 내가 수백 년의 시간을 관통하여 어제의 나와 연결됨을 느낍니다.

DSC0021730분쯤 걸었습니다. 국사봉 2km. 이정표를 지나니 오른쪽으로 오똑한 바위가 햇살을 바지런히 받고 있습니다. 왠지 전망대 필이 납니다. 걸음을 멈추고 올라서니 전망이… 기가 막히네요. 실미도입니다. 왜 실미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실미도 바닷길이 아스라이 열리는 모습이 가느다란 실이 연결된 듯합니다. 하늘의 구름은 점점이, 멀리 섬들도 점점이. 그림입니다. 조금 더 걸으니 나뭇잎 사이사이로 내려앉은 햇살이 흙길에 몽글몽글하게 빛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한편엔 벤치도 비뚜름하니 늘어서 있고요. 보기만 해도 다리 쉼, 마음 쉼이 되는 벤치입니다.

호젓한 숲길에 취한 듯 걷다 보니 갑툭튀처럼 헬기장이 펼쳐집니다. 오 이 열기, 장난 아니네요. 정면으로 국사봉으로 오르는 길이 나름(?) 가파르게 구불거리는 게 보입니다. 일단 소나무 그늘로 숨어들어야겠습니다. 작전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간식도 필요하고요. 물 한 모금에 숨을 돌리면서 보니 이미 선배는 야구모자에 손수건을 둘러서 (어찌 보면) 아랍스타일을 완성했습니다. 저도 벙거지를 꺼냅니다.

쉴 새 없이 땀을 훔치는 선배를 뒤에서 몰아가듯 국사봉을 오릅니다. 국사봉은 예부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터로 산꼭대기에서 금동불상과 수백 개의 토우가 출토됐답니다. 이러한 국사봉이 그동안 이름 없이 지내오다가 1995년 산 이름 찾아 주기 동호회가 국사봉이라 정식으로 이름을 붙여주면서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국사봉은 해발 230m, 호룡곡산은 244m로 그렇게 높진 않습니다만, ‘해발고도’라는 용어를 우직하게 온몸으로 체감하며 올라가야 하는 게 섬 산행입니다. 체감 고도는 3~400m가 넘습니다. 배 위에서 선배한테 400m 가까이 된다고 얘기해줬는데 정작 230m라니 무안했답니다. 기억이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요?

국사봉 정상입니다(데크 옆을 보면 아담 사이즈의 국사봉비도 있습니다). 아늑한 전망 데DSC00221하나개해수욕장 DSC00222국사봉크가 마련되어 있어 쉬기도 좋습니다. 전망은 두말할 필요 없지요. 저만치에 하나개해수욕장이 보이네요. 바다가 산을 질투해 한 움큼만 뺏어간 듯 오목하니 펼쳐진 백사장이 예쁩니다. 우뚝 서 있는 집라인 타워에서는 ‘야아아아…’하는 환호성이 환청으로 귓가에 울리는 듯합니다. 지난번 캠핑 때 백사장에 텐트를 쳤는데요, 오후 내내 비명을 내지르는 엉덩이가 날아다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무의도는 캠핑도 강추입니다. 북적대지 않아 좋고 하나개해수욕장엔 조개도 엄청 많습니다. 갯벌을 그냥 걸어 다니다 보면 조개는 절로 발가락 사이사이로 끼어든다면 믿으실 여나? (하나개해수욕장은 조개씨(?)를 뿌려서 경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수욕장 입장료도 받습니다.)

보랭백에 고이 모셔온 맥주캔을 꺼내 들자 활짝 펴지는 선배 얼굴이 보기 좋습니다. “머 이런 걸 다 준비했냐?”며 얼른 옆에 와 앉는 선배는 형수가 마련해준 김밥을 꺼내 놓습니다. ‘땅’ 하며 캔 따는 소리와 함께 부글부글 부푸는 하얀 거품… 아, 좋습니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요? 오늘 우리가 걷는 동안 맥주도 부지런히 발효되고 숙성되는 시간을 가진 게 틀림없습니다. 이 순간도 제 속에서 오래오래 숙성되어 훗날 향기로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은 느리게 느리게 흘렀으면 합니다.

며느리밥풀꽃 DSC00226구름다리건너편의 호룡곡산이 늠름합니다. 올랐으면 내려가는 게 순리지만, 다시 올라야 하니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국사봉과 호룡곡산은 능선 끝에서 구름다리로 연결됩니다. 요즘은 며느리밥풀꽃이 한창이네요. 며느리 붉은 입속에 밥풀떼기 2개가 붙어있는 앙증맞은 모습이 이름 그대로입니다. 근데 신나게 내려와 보니 도로가 나와버렸습니다. 아뿔싸, 능선을 잘못 탔네요. “이 산이 아닌가 벼” 상황입니다. 선배한테 무안하고 내 다리에 미안하고 괜히 이정표가 원망스러운. 방향을 살피니 구름다리는 저쪽으로 꽤 걸어야겠습니다. 뭐, 나쁘지 않습니다. 마을 길을 걷다 보니 제주 올레길을 걷는 기분도 들고(또는 든다고 굳이 느끼고) 그렇습니다.

DSC00227 DSC00229하나개해수욕장 입구에서 다시 등산로로 접어듭니다. 오르막을 오르자마자 쉼터가 나타납니다. ‘재빼기 라이브 cafe’, 큼직한 냉장고에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각종 탄산수가 열을 맞춰 진열되어 있습니다. ‘무인판매, 모든 것은 셀프 판매함’이라고 적힌 팻말이 있네요. 밑에 다소곳이 놓인 항아리의 용도를 알겠습니다. 괜스레 흐뭇해집니다. 이제 호룡곡산으로 바로 치고 올라갑니다. 모든 정상이 그렇듯 나올 듯 나올 듯 나오지 않습니다. 동트기 직전이 제일 추운 법. 정상과의 술래잡기에 지친 선배가 쉬어가자 하지만 조금만 더 가면 된다며 재촉합니다. 벌써 단풍 물이 든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올려다본 나뭇잎 풍경에 감탄이 나옵니다. 선배를 기다리며 가만히 이른 가을을 느껴봅니다.

DSC00230호룡곡산 정상 DSC00232호룡곡산에서 본 하나개해수욕장드디어 정상 도착. 널찍하니 마련된 데크 너머로 서해의 섬들이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립니다. 섬 너머 섬이 포개진 풍경, 첩첩섬중 섬섬산골입니다. 저기가 덕적도고 저기는 이작도 저어기는… 섬 안내도를 보며 가늠해 봅니다. 밑으론 하나개해수욕장이 시원하게 뻗어있고 물 빠진 해안엔 모래벌판이 광활하게 펼쳐졌습니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은 조금 있는, 벌써 몇 번째이지만 오를 때마다 감탄하는 풍경입니다. 커피 한 잔이 필요한데 그만 깜빡했습니다. 보온병만 들고 오는 실수를. 아쉬운 대로 그 또한 추억이 되리라 생각하며 마냥 바다를 바라봅니다.

DSC00231 DSC00235소무의도이제 광명항으로 내려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소무의도는 일품입니다. 광명항까지는 2km. 금방이라면 금방이지만 시계가 이미 1시가 훌쩍 넘었습니다(하산길을 못 찾아 또 한참을 헤맸답니다, 무안하게도). 산행을 마치고 먹으려고 미뤄둔 점심상을 차립니다. 김밥에 특제 사발면. 뭐 대단할 건 없고 걸으면서 산초 열매가 보이길래 한 움큼 갈무리했다가 라면에 넣었습니다. 생열매 그대로라 향이 날까 했는데, 웬걸요. 너무 진한 향에 선배는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입니다. 별미네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 배가 찼으니 또 걸어야지요?

DSC00236 DSC00238광명항에 도착했습니다. 높다란 구름다리 너머로 소무의도가 우리를 유혹합니다. 다리가 놓인 후로 소무의도 둘레길이 생겨 아주 인기라는데. 일필휘지로 내달린 호룡곡산 종주 산행 뒤 호룡점정(?)으로 소무의도 둘레길까지 걸을 계획이었는데, 그만하렵니다. 지금의 이 기분 좋은 피곤함이 딱 좋습니다. 오늘 좋은 거 하나쯤 남겨두어야 내일 또 무의도를 찾겠지요. 참고로 호룡곡산 정상에서는 광명항으로 내려가는 코스도 좋지만, 하나개해수욕장으로 내려서는 길도 아주 환상입니다. 이름도 ‘환상의 길’입니다. 다만 이정표가 헛갈려서 마당바위 부근에서는 주의해서 길머리를 잡아야 한답니다. 물때만 잘 맞으면 정상에서 본 드넓은 모래벌판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개해수욕장은 보너스!

여럿이 함께 걸으면 말을 너무 많이 하거나 많이 듣게 돼서 지칩니다. 혼자 걸으면 무료하고 외로워서 지치고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선배랑 둘이 걸은 무의도. 조용한 가운데 두런두런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을 DSC00239광명항1 DSC00241소무의도 구름다리수 있어 좋았습니다(탁 트인 바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무의도하였지만 유의미했던 여행이었다고 총평해 볼까요? 담엔 소무의도 둘레길을 걸어야겠습니다.

P.S 무의도에 가자니 어느 선배가 하는 말, “무의도? 거긴 옷을 안 입고 다녀서 무의도(無衣島)냐?” 음…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舞衣島랍니다. 춤추는 무희의 치맛자락처럼 아름다운 섬이라고. 그러고 보니 호룡곡산 정상에 서서 내려다본 산세며 능선 자락이 꼭 훨훨 나는 무희의 치맛자락 같았습니다. 용과 호랑이가 휘감기듯 수놓인 치맛자락……


계양산 송신소에서 본 무의도2 (사진 중앙)<산행 summery>
1. 등산코스
큰무리 선착장 – 실미 유원지 입구 삼거리 – 국사봉 – 재빼기고개 구름다리 – 호룡곡산 – 광명항으로 이어지는 6km의 등산코스는 3~4시간이면 누구나 완주할 수 있다.

2. 교통
– 승용차 : 영종대교 또는 인천대교로 영종도 진입 후 용유, 무의 방면으로 주행하여 무의 도 이정표 따라 잠진도 선착장 도착
(선착장 주차공간이 협소하므로 주말에는 용유역 앞 회타운 주차장 이용 추천)
– 대중교통 : 겨울철을 제외한 주말이나 휴일에는 용유역까지 전철이 연장 운행된다.
(평일엔 인천공항역에서 2-1, 222 버스 탑승 후 잠진도 선착장 하차)
– 무의도 배편 : 잠진도 선착장에서 매시 15분, 45분 운행 (무의도에서는 매시 정각, 30분)
물때와 기상조건에 따라 바뀔 수 있으니 사전 체크가 필요하다.
무의해운 http://www.muuido.kr (032-751-3354)
요금은 왕복으로 3,000원, 차량은 21,000원(기사1인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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