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군의 B급 잡설 – 인생의 회전목마 2

C군의 B급 잡설 – 인생의 회전목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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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 영화 ‘백 투 더 퓨처’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상 깊게 기억할 영화 속 타임머신의 베이스가 된 스포츠카 ‘드로리안 DMC-12’의 이야기를 꺼내며 DMC(DeLorean Motor Company)의 창업주 존 드로리안(John Zachary DeLorean)의 인생을 반쯤 펼쳐보았습니다. 정확히는 최연소 GM 경영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미운털 박혀서 회사 밖으로 밀려난 1973년까지의 이야기를 간략히 해드렸습니다. 1973년 상류 인텔리 실업자가 된 드로리안은 그 비범한 능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케일도 남다르게 아예 자동차 회사를 하나 차리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1975년 DMC(DeLorean Motor Company)를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창업합니다.

   
▲ [그림 1] 드로리안 DMC-12출처 : www.streetlegaltv.com

그런데 말입니다…… 구멍가게도 아니고 자동차 회사 같은 큰 사업을 하는데 100% 자기 돈 가지고 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을 겁니다. 아무리 드로리안이 GM의 경영진으로 일하다 실업자가 되었다고는 해도 자동차 회사를 개인 돈으로 차릴만한 능력은 없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그건 분명 부정하게 납품업체로부터 뒷돈을 받거나 회계조작으로 회사 돈을 삥땅(비속어지만 찰진 느낌의 효과를 위해 사용합니다.)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아니, 그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엄청난 축재를 했다고 해도 자동차 회사를 개인자본으로 창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DMC를 창업하기 위해 드로리안은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댔습니다. 은행에서 빌리거나, 동업관계를 맺거나, 친분이 있는 유명인사들의 여유 자금을 투자받는 등의 방법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당시 드로리안은 유명한 업계의 스타였기 때문에 사업에 필요한 돈을 융통해 나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짓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자동차를 생산하지 못하는 자동차 회사는 있을 수 없기에 드로리안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공장을 짓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실업률이 높아서 산업장려를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나라들을 접촉합니다. 그런 나라들이라면 자동차 공장을 유치하는데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실업률이 높은 나라들을 이리저리 알아보며 공장건설을 물색하던 중 두 곳을 후보로 올립니다. 푸에르토리코의 버려진 공군기지와 아일랜드(아일랜드 공화국)였습니다. 처음부터 아일랜드(아일랜드 공화국)와는 이야기가 잘 안되어서 푸에르토리코의 버려진 공군기지를 마음에 굳히던 중에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당시 북아일랜드와 영국본토는 극심한 대립과 소요사태를 앓고 있었는데, 실업률 개선을 통해 이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영국정부가 드로리안의 공장유치에 나선 것입니다.

   
▲ [그림 2] 아일랜드 (파란색: 영국령 북아일랜드, 주황색: 아일랜드 공화국)

드로리안의 공장건설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엔 아일랜드(아일랜드 공화국)가 나왔다가 북아일랜드가 나오면서 영국 정부까지 끼어드니 혼란스러우시죠? 아일랜드(아일랜드 공화국)-북아일랜드-영국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원래의 아일랜드([그림 2]의 주황색과 파란색 영역)는 12세기 이래 영국의 침입을 받으며 점점 영국에 종속되어 갔다고 합니다. 이 종속과정에서 영국 본토의 종교가 아일랜드인들에게 강요되기 시작하며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일랜드는 구교를, 영국은 신교를 믿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갈등을 영국은 무력으로 진압하며 동시에 아일랜드인의 토지를 몰수하고 그들을 소작농으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비참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차별을 받는 아일랜드인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로 인해 여러 소요사태와 분쟁이 시작되며 민족적 저항이 거세져 갔습니다. 복잡한 갈등의 과정과 무력사태를 겪으며 결국 1921년 ‘아일랜드 자유국([그림 2]의 주황색 영역)’으로 영국으로부터 자치령으로 인정을 받지만 군사, 경제, 외교 등은 여전히 영국이 장악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외부에서 유입된 신교도가 많은 북아일랜드([그림 2]의 파란색 지역)는 자치령이 아닌 영국령으로 남았습니다. 이후 1949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완전독립을 이룬 후에도 북아일랜드의 영국지배는 지속되었으나 신교와 구교가 공존하는 북아일랜드가 평온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수 가톨릭계는 취업이나 선거에서 항상 불평등을 감수해야 했기에 신‧구교파 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아일랜드 공화국)의 통합을 요구하는 유명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활동으로 분쟁이 한동안 지속됩니다.

소요가 끊이지 않는 북아일랜드에 일자리가 많아지고 경제가 활성화 된다면 정치적으로도 안정이 될 거라는 판단에 영국 정부가 혜성같이 드로리안의 공장건설에 뛰어든 것입니다.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는 것 같지만 DMC의 자본금 중에 60%를 영국이 부담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매우 큰 자금을 영국정부가 투입합니다. 물론 영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동분서주하며 자본금을 모으고 영국의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행운도 얻은 끝에, 드디어 1978년에 북아일랜드 벨파스트(Belfast)의 던머리(Dunmurry)라는 곳에 공장([그림 3])을 착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공장에서 장차 생산될 차가 [그림 1]의 ‘드로리안 DMC-12’입니다.

   
▲ [그림 3] 북아일랜드의 DMC 공장출처 : www.aronline.com

공장건설까지의 과정을 설명드렸으니 이제 다시 그 공장에서 생산될 DMC-12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DMC-12의 이야기는 공장착공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DMC-12의 프로토타입([그림 4])은 1976년에 완성이 됩니다. 1975년 DMC 창업 1년 후의 일입니다. 프로토타입의 디자인은 유명한 이탈리아의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쥬지아로(Giorgetto Giugiaro)의 손을 거쳤습니다. 쥬지아로는 이탈디자인(Italdesign)이라는 카로체리아(Carrozzeria)를 창업한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입니다. 카로체리아라는 말이 다소 생소할 수 있어서 설명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카로자(Carrozza)는 고급마차를 의미하고, 카로체리아는 고급마차를 만드는 공방을 의미했습니다.

   
▲ [그림 4] 조르제토 쥬지아로가 디자인한 드로리안 DMC-12의 프로토타입출처 : pro-stories.ru

마차에서 자동차로 넘어가던 초기의 자동차 산업은 마구를 만들던 제작소가 엔진과 차의 뼈대를 만들고, 마차의 화려한 외관과 실내를 만들던 카로체리아가 자동차의 외관 및 실내를 제작하는 형태였습니다. 자동차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엔진과 차대를 만들던 제작소가 내외관을 다 갖춘 완성차의 대량생산이 가능한 형태로 변모해갔고, 카로체리아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부유층을 상대로 양산차 기반의 특별 차량을 소량으로 제작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특히 이런 전통이 두드러지던 이탈리아에서 카로체리아가 번성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카로체리아로는 페라리의 디자인을 전담하는 것으로 유명한 피닌파리나(Pininfarina), 람보르기니 쿤타치(Countach)로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던 베르토네(Bertone), 그리고 유독 한국 자동차를 많이 디자인했던 이탈디자인(Italdesign)이 있습니다. 이 3대 카로체리아 중 하나인 이탈디자인의 창업자가 바로 쥬지아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잘 모르고 있지만 쥬지아로는 많은 한국 자동차들을 디자인 했습니다. [그림 5]에 쥬지아로가 디자인한 한국 자동차들을 몇 개 추려봤습니다.

   
▲ [그림 5] 조르제토 쥬지아로가 디자인한 한국의 자동차

쥬지아로 디자인의 DMC-12 프로토타입은 시대를 뛰어넘는 진보적 설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엔진은 일전에 소개해 드린 적이 있던 로터리 엔진을 얹을 예정이었고, 차체는 특허구입을 통해 확보한 첨단 공법을 적용하면 고품질을 유지하며 혁신적 원가절감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외관은 녹슬 염려가 없는 스테인리스를 사용할 예정이었고, 문은 통상적인 옆으로 여닫는 방식이 아닌 위로 여닫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 위로 여닫는 방식을 걸윙(Gull Wing) 도어라고 부르는데, 차문을 열어 놓고 앞에서 보면 마치 날고 있는 갈매기의 날개처럼 차문이 지붕 위로 펼쳐져 있어서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설계상의 장점들을 종합해보면, 프로토타입이 순조롭게 양산차 개발로 이어져 생산이 시작되는 경우, DMC-12는 우주최강의 자동차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밋빛 청사진들 중에 현실에서 이룰 수 있었던 것들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로리안이 아무리 업계의 스타였고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한들, 이렇게 시대를 앞서는 걸작이 매우 순탄하게 설계대로 양산이 된다면, 왜 세계 유수의 자동차 회사들은 각사마다 시대의 걸작을 이따금 이라도 내놓지 못하는 걸까요? 아마도 생각처럼 쉽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1975년 창업, 1976년 쥬지아로의 디자인을 입힌 혁신적 프로토타입, 1978년 공장착공…… 모든 게 순조롭게 흐르고 있었고, 세계인의 드림카를 향한 드로리안의 거침없는 행보는 장애물이 없어 보였지만, 사실 운명의 변곡점은 그림자 보다 더 조용히 드로리안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서 혼탁해져 가는 드로리안의 인생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P.S.
C군의 잡설은 귀동냥에 근거하여 재구성된 것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항상 유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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