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군의 B급 잡설 : 프롤로그

C군의 B급 잡설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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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방송과기술‘ 독자 여러분, 이번 호부터 연재를 시작하게 된 C군입니다. 현재 지상파 K본부에 재직 중인 경력 12년차 C급 방송기술인이고 출처가 불분명하고 내용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B급 잡설로 소일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인 필부(匹夫)입니다. 지난 날 본지에 두어번 글을 내민 것이 인연이 되어 올해부터 전격 발탁, 연재를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 연재를 결심할 때까지도 본 연재의 기획의도는 격조와 품격이 넘치는 자동차 엔지니어링 세계로의 안내와 이를 통한 독자들의 교양 고취 및 세계와 삶에 대한 통찰의 확장에 기술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차가운 철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자동차라는 기계 구조물, 그것은 장대한 인류사를 관통하는 혁신적 자연철학과 기술, 그리고 예술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시에 자동차는 시대를 풍미한 장인정신과 예술혼의 치열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자동차만큼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온전히 담아낸 창조물이 있었던가?”

지금 이 질문에 순간적으로 2012년을 강타한 ‘건축한개론’의 뮤즈 수지의 청순한 얼굴과 첫사랑의 달달씁쓰름한 추억이 가시덤불처럼 심장을 얽으며 조여와 아파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이유를 막론하고 건축이 자동차보다 더 지성적이고 감성적인 대상일 것입니다. 수지와 첫사랑과 건축…… 이 아무 연관의 끈도 찾을 수 없는 연속적인 연상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포스트모던한 독자라면, 진정 그러한 사람이라면, 위의 질문 따위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고, 배울만큼 배운 지식인이고, 민주사회의 주체적 시민입니다. 먹고 사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시덥지않은 문제를 들이밀며 동의를 강요하는 것은 시대정신을 역행하는 것이니 더 이상 무리한 동의를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건축이면 어떠하고 자동차면 어떠하리…… 중요한 것은 기술로 문명을 조명해본다는 기획의도 아닌가……?” 아주 이공계적인 우아하고 참신한 발상이었습니다. 스스로가 대견할 정도로……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인류문명의 결정체 ‘자동차 기술’을 통해서 과학과 예술의 대역사를 탐구하려는 의도로 흔쾌히 연재를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의미 있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뿌듯한 마음도 잠시뿐, 이내 기술적 문제가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직장생활까지 C군을 괴롭히는 이 지긋지긋한 표현…… ‘기술적 문제’……

이 ‘기술적 문제’의 핵심은 바로 C군이 제공할 수 있는 자동차 관련 콘텐츠의 방향성이 너무도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C군이 자동차에 관한 잡스런 지식들을 하나씩 쌓아온 과정과도 무관치 않습니다. 아마도 이 과정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앞으로 이 연재의 흐름에 대한 어렴풋한 윤곽을 잡는 것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여 서술하고자 합니다.

C군이 초딩 5학년이던 1986년, C군의 인생에 파란을 몰고 온 일대 사건이 있었습니다. 국내 모형업계의 지존이었던 아카데미과학에서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TAMIYA의 철지난 금형을 들여와 R/C카를 생산 및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국산 1호 R/C카 GALAXY 버기(TAMIYA의 Grasshopper 카피모델)였습니다.

   
▲ 아카데미과학의 R/C카 광고

그 당시 국내에 수입되던 TAMIYA의 R/C 카들은 10만원~20만원 사이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C군은 기억합니다. 이에 반해 세계시장에서는 철지난 모델이기는 하지만 3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출시된 아카데미과학의 갤럭시버기는 국내 R/C카 대중화의 첫걸음을 내딛는 기념비적인 모델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숙했던 한국경제의 수준과 협소한 내수시장 탓에 아카데미과학의 신차개발(?)이 지지부진해지고 신제품 출시도 드물어 시장은 고가의 고성능 수입 R/C카 시장과 저가의 보급형 국산 R/C카 시장으로 양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카데미과학의 R/C카를 구입했던 C군도 몇 년 후에는 아끼고 아껴서 꿈에 그리던 TAMIYA의 4륜 독립현가 방식 4륜구동 R/C카를 손에 넣기도 했습니다.

R/C카를 처음으로 조립하는 모든 한국의 소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공통의 경험이 있습니다. 이상한 용어들이 조립설명서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 입니다. 앞바퀴의 ‘토우(Toe)’, ‘캠버(Camber)’, ‘캐스터(Caster)’를 어떤 각도로 조절하라느니, 뒷바퀴의 ‘차동기어(Differential Gear)’는 구리스(Grease)를 넉넉하게 바르라느니, ‘현가장치(Suspension)’는 어떻게 맞추라느니…… 초딩 5학년의 C군은 R/C카를 조립하며 이런 전문용어의 사용에 우쭐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차동기어와 현가장치 같은 기계적 구조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1988년 중1이 되어 4륜 독립현가 방식의 수입산 4륜구동 R/C카를 굴리던 카푸어(Car Poor) C군은 두 번째 충격적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당시 명동 중국대사관 앞 수입서적 가게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주로 교보문고와 종로서적이 학구적인 수입서적들을 다루고 있었다면, 이곳은 레저와 취미생활(?)에 도움을 주는 수입서적들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길거리에 수입차도 별로 없었고, TV와 라디오를 제외하면 별다른 매체가 없어서 외화를 보다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스포츠카를 보는 것을 제외하면 멋진 차를 구경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명동 중국대사관 앞의 수입서적 가게에서 파는 자동차 잡지를 보는 것뿐이었습니다. 또래의 아이들은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서 인기리에 출판되고 있는 예술성 높은 19금 잡지를 곁눈질하려고 그곳을 기웃거렸지만 C군은 페라리(Ferrari), 람보르기니(Lamborghini) 등의 예술성 높은 이탈리아 종마들의 사진을 곁눈질하려고 그곳을 기웃거렸습니다.

낮에는 국내 방송이 없어서 심심함을 달래려 많은 집들이 AFKN을 그냥 틀어놓던 것이 유일한 영어 조기교육이던 시절, 13살 소년이 전부 영어 아니면 일어로 되어 있던 잡지를 통해서 지식을 얻는 방법은 사진을 통해서 많은 기계적 작동을 유추해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C군은 매일 자동차 잡지의 사진들만 뚫어져라 보며 기계장치들의 작동원리를 상상하다가 부모님께 혼나기도 많이 혼났습니다. 그렇게 혼내시면서도 잡지 덕에 밖에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는지 가끔씩 멋진 잡지를 사다주셔서 심심치 않은 중딩 시절을 보냈습니다.

   
 
   
▲ C군의 청소년기를 함께한 잡지들 중에서

이렇게 C군이 잡지를 통해 자동차 세계와의 인상적인 조우를 반복하며 성장소설을 쓰고 있던 시절 우리나라의 자동차 시장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C군이 초딩 6학년이던 1987년 최초로 수입차 시장이 개방되고 이듬해인 1988년 소형수입차 시장까지 완전개방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30~50%에 달하는 높은 관세와 일본차 수입 억제 때문에 시장이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C군이 대학에 입학한 1994년 미국의 통상압력으로 시장개방의 폭이 커지고  1995년 10%이던 관세가 8%까지 떨어지면서 판매가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C군이 대학 졸업반이던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수입차 시장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일본산 차량 수입제한이 풀린 1999년 이후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C군이 늦깍이로 군입대를 했던 2000년 이후 매년 20~30%의 판매증가를 기록하여 현재 점유율 12%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즘 신규등록차량 100대 중 12대 정도는 수입차입니다. 게다가 80년대에는 외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한국의 도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아련한 추억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C군의 성장기와 한국 수입차 시장의 변천사에서 뭔가 불안한 냄새를 맡기 시작했을 것 같습니다.
“이 친구 왠지……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케이스 같은데 ?”
또는, “자동차 기술을 통해 인류의 문명을 조명하네 마네 하더니 장난감 이야기하고 잡지 이야기 빼면 다른 이야기는 하나도 없네?”같은 의문이 독버섯처럼 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죄송하지만…… 그 독버섯 같은 의문이 바로 정답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진실로 고백합니다. 여기 이 C군은 차를 주로 잡지로 배웠습니다. 직접 몰아본 차는 아버지께 물려받은 98년식 낡은 국산 올드세단이 전부입니다. 가끔 소위 고성능 차량이라는 것들을 타보기는 했지만 직접 운전대를 잡아본 것이 아니고 팔자 좋고 유복한 친구들의 그 고성능 차량의 조수석에서 전후좌우로 몸에 느껴지는 가속도를 느껴본 것이 전부입니다.

   
▲ C군의 98년식 올드세단

80년대처럼 길거리에 국산차만 돌아다니고 그나마 어쩌다 한 번 명동이나 압구정 같은 곳에서 드물게 보이는 외제차는 사장님들이나 외교관들이 들여온 경우가 대부분인 시대라면 C군처럼 잡지로 자동차를 배운 사람도 마치 자신이 마이클 슈마허(F1 챔피언)라도 되는 냥 이름도 생소한 이런 저런 Exotic Car를 품평하며 ‘깝’을 떨어도 어지간히 약발이 먹힐 공산이 크겠지요. 하지만 이미 지금은 국내에서도 다양한 차를 볼 수 있고, 각종 자동차 정보가 인터넷에 넘치는 시대입니다.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인터넷에 다양한 차를 직접 보고 듣고 감각해본 사람들의 흥미로운 글들이 넘치고 있는 현실에 C군은 차에 대해 어떤 ‘썰’을 풀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이 깊어질수록 길을 잃어갔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깊은 고민에 점점 미아가 됨을 깨닫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고독이 C군의 온 영혼을 휘감았습니다.

“왜 덜컥 우쭐해서 연재를 수락했을까……”

 보헤미안도 아닌 주제에 조금은 즉흥적인 이놈의 성격이 뭐라도 사단을 낼 줄은 알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막막함이 너무도 낯설어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남자가 고독할 때는 아무도 없는 옥상에 올라 혼자서라도 담배를 태우거나 보잘 것 없는 안주에 쓴 소주를 몇 잔 마시는 것이 보통입니다. C군도 소주나 한 병 사다가 독작이나 하는 것 밖에 별 다른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한두잔 마시다 보면 또 아릿한 노래 한 가락이 고파지는 것이 일상다반사라서 노래까지 안주삼아 독작을 합니다.
 
C군은 촌스럽고 철지난 노래들을 좋아하는데요. 한일관계가 심각히 경색되고 있는 요즘에도 독작을 할 때면 즐겨듣는 일본 노래가 있습니다. ‘모리타 도우지’라는 일본 여가수의 ‘나와 관광버스를 타보지 않을래요?’라는 노래입니다. 군국주의와 별 상관이 없는 노래이니 YouTube에서 찾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쓸쓸한 멜로디와 중반부의 독백이 ‘겨울 나그네’ 같은 옛 한국영화의 분위기와 묘하게 중첩이 되며 헤어나올 수 없는 감정의 파고를 만들어 냅니다. 독자 여러분을 위해 아래에 가사를 남깁니다. 일본어가 원래 한국어와 매우 유사해서 한자 몇 개로 대충 때려보면 의미를 짚어내는데 큰 무리가 없습니다.

 

ぼくと観光バスに乗って見ませんか。
나와 관광버스를 타보지 않을래요?

もしも君が疲れてしまったのなら
ぼくと観光バスに乗って見ませんか。
色鮮やかな新しいシャーツを着て
季節外れのぼくの町は
何にもないけれど君に
話ぐらいはしてあげられる。

만약 지쳐버렸다면
나와 함께 관광버스를 타보지 않을래요?
빛깔 고운 새 셔츠를 입고
철 지난 나의 거리가
별거 아니긴 하지만 당신에게
이야기쯤은 해 줄 수 있어요
 
[독백]
ぼくの小さな海辺の観光地に
もうすぐ冬が来ます。
君も一度気が向いたら訪ねてください。
がけ

[독백]
나의 작은 바닷가 관광지에는
이제 곧 겨울이 와요
당신도 기분이 내키면 한번 찾아 주세요
친애하는……
 
もしも君が全て嫌になったのなら
ぼくと観光バスに乗って見ませんか。
君と今夜が最後なら
Transistor radioから流れる
あのDo you wanna danceで
昔みたいに浮かれてみたい。
あのDo you want a danceで
昔みたいに浮かれてみたい。

만약 모든 것이 싫어졌다면
나와 함께 관광버스를 타보지 않을래요?
오늘이 당신과의 마지막 밤이라면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흐르는
저 Do you wanna dance에
옛날처럼 들떠보고 싶어
저 Do you wanna dance에
옛날처럼 들떠보고 싶어

몇잔의 술과 신파조의 노래가 진실로 나의 황망한 가슴을 어루만졌는지 약간의 안도가 찾아왔고, 걱정했던 사단은 내지 않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기분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래…… 자동차 각 부분의 기계적 구조를 취미가의 수준에서 간단히 설명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거야…… 수준은 좀 떨어지겠지만 재미로 읽는 독자들에게 조금의 흥미라도 불러일으키면 되는 거 아니겠어?”

수많은 자기합리화와 약간의 대범함을 통해 연재의 각을 잡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고 길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원래 사람이 마음이 편해지면 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꼭 자동차 이야기가 아니라도 중간중간 정말로 잡설에 가까운 삶의 단상들을 끼워 넣으면 괜찮겠다는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C군은 분연히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나 단숨에 연재의 제목을 정했습니다.

‘C군의 B급 잡설’

그럼 독자 여러분!
다음 호부터 얄팍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은 자동차에 관한 기계잡설들과 간간히 모호한 생활잡설로 도배된 ‘C군의 B급 잡설’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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