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둑 이야기

나의 바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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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두셨어요. 잘 두셨어요.”

김성룡 프로의 위로는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잘 두었지만 그게 아마추어의 한계이고,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다”라는 말처럼 들렸다. EBS가 “2013년 전국 직장인 바둑대회”에서 기세 좋게 8강에 진출했지만 POSCO와의 둘째 판 페어바둑에서 지면서 아쉽게 연승행진을 멈추게 되었다. 변명 같지만 POSCO 선수 3명 모두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이었다. 당연히 그들이 우승했다.

   
▲ 2013년 Basso배 전국 직장인 바둑대회를 마치고 찍은 기념 샷(왼쪽부터, 김석태 EBS선석회 회장, 필자, 이상훈 사범, 바둑TV리포터, 김성인 AD, 이철수 부장, 전영빈 EBS선석회 총무)

자랑 같지만 EBS는 전통적으로 바둑이 세다. 1994년 언론노조바둑대회에서 4강에 들고부터 줄곧 입상을 했다. 그때 저녁 회식에 내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셨던 분이 나중에 알고 보니 권영길 전 민노당 대표셨다. 이후 EBS는 많은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었고 대회가 없어질 무렵에는 EBS가 대회 우승을 너무 독식해서 그렇게 됐다는 소문만 흉흉할 뿐 우리는 그동안 받았던 상금이 아쉬웠다. 최근엔 바둑TV가 주관하는 직장인 바둑대회에서는 언론사 대표로 EBS만 초대를 받았고 2013년 단체전 8강까지 진출했다.

최근 바둑이 몇몇 부분에서 반짝한다. 먼저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가 두 편 나왔다. ‘스톤’, ‘신의 한 수’인데 두 편 다 바둑과 조폭과의 관계를 그리고 있고, ‘신의 한수’는 4일 만에 1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트의 공식을 따라 흥행을 하고 있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정우성의 연기력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암튼 오랜만에 들어보는 바둑 얘기인지라 반가웠다. 스톤은 개봉관이 몇 개 안 돼 극장에서 못 보았는데 최근 VOD를 통해 보았다. 웹툰 미생도 바둑에 빗대어 직장생활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어 많은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 ‘신의 한 수’, 웹툰 ‘미생’, 영화 ‘스톤’

   
▲ 영화 ‘STONE’ 중 한 장면(영화를 보다가 깜짝 놀랐는데 자세히 보니 화면 제일 왼쪽에 카메오로 출연한 ‘EBS 하나뿐인 지구’ 조연출 성인이가 보인다. 지금은 EBS를 떠났는데 EBS를 떠나고 찍었는지 있을 때 찍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재능이 안타깝다.)

또 하나의 이슈는 7월 초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접견 시 귀빈중 이창호 9단이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는 시진핑 주석이 바둑을 좋아해 이창호 9단을 불렀는데 시주석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창호 9단은 알아보고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한국기원 기사가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한다. 이창호 9단은 중국에서 생불, 석불로 불린다고 한다. 한때 이창호 9단이 천하를 호령할 때 중국의 많은 기사들이 이창호를 넘어야 할 최고의 목표로 삼은 적이 있었고 공한증이라는 말을 생기기도 했다. 옛날 일본에서 오청원 기성이 천하를 제패하고 있을 때 누가 오청원 기성에게 바둑의 신이 있다면 몇 점 놓고 두면 자신이 있냐고 질문한 적이 있는데 오청원 기성은 석 점이면 해 볼 만하다고 했는데 그 바둑의 신이 중국인들에게는 아마 이창호였을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 수석에게 수천만 원하는 바둑알을 선물했다고 해서 화제다. 또한 바둑알을 만든 사람이 일본천왕 선물을 위해 팔라는 제의를 거절한 것 또한 화제다.(사진출처: TV조선 화면 캡처)

나에게 바둑은, 마누라가 이 말을 들으면 좀 섭섭하겠지만, 인생의 외로운 길을 늘 같이 해준 평생의 동반자이다. 초등 6학년에 도시로 나와 많이 외로웠고 바둑은 가끔씩 나의 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물론 학업과의 시소게임은 대학 졸업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끝까지 놓지는 않았다. 나는 중2 때 영어 과외 선생님 집에서 바둑을 처음 접했고 이후로 자취방에서 친구들이랑 또는 동네 기원을 전전하면서 머리가 녹슬지 않도록 단련을 시켰다. 그때는 그래야 살 수가 있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 청소년기를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기적과 같은 일이다. 한동안은 게임 자체에 집착했다. 진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고 내가 진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았다. 그때 바둑이 좀 늘었던 것 같다. 젊어서 바둑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여 자괴감도 갖게 만들었지만 가끔씩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할 계기도 마련해 주었다.

   
 

살면서 몇몇 바둑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 고1 겨울방학 때 외갓집에서 외사촌 동기와 3일 밤을 세가며 바둑을 둔 이후 우리는 필생의 라이벌처럼 방학 때면 바둑판을 마주하고 만났다. 처음에는 내가 많이 딸렸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조금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후 대학 다닐 때도 만났고 졸업하고도 만났는데 한 번은 설악산 산행을 같이 갔었고 소청산장에서 사람들 틈에서 바둑판을 편 기억도 있다. 또 하나의 기억은 대학축제 때 바둑시합에서 선배 형을 이기고 올라가 준우승하여 바둑판을 부상으로 받은 기억도 있다. 그때 준결승에서 이긴 형은 평소에 내가 두 점을 깔고도 버겁던 써클 형이었는데 그날은 호선으로 이겼다. 한판을 3~4시간 정도 둔 것 같다. 공부에는 할 수 없었던 집중을 그때 한 것 같고 그 형을 이기면서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 어느 한 곳에 집중을 하면 평소에 갖고 있던 실력 이상이 나온다는 것과 내가 시합바둑에 좀 강하다는 사실……. EBS 입사 후 94년 언론노조연맹에서 주최하는 바둑시합출전을 위하여 EBS노조는 사내바둑대회를 열었는데 내가 이겨 EBS 대표로 바둑시합에 나가게 되었고 4강에 들었다. 그때 받은 기념품인 화장실 시계가 아직도 우리 집 화장실에 건재하다. ‘Made In Korea’의 힘이다. ‘Made In China’였으면 1년을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무렵에 집사람을 처음 만났고 그해 여름 결혼했다. 바둑은 장고파에 속하지만 결혼은 다소 속기로 이루어졌다. 바둑보다는 인생이 훨씬 어려웠던 것 같다.

   
▲ 1995년경 바둑시합 전경(제일 앞쪽 왼쪽이 필자이고, 제일뒤쪽 중간에 지금은 작고하신 故 류근수 국장님이 보인다. 중간에 한용술 부장님, 박대영 부장님, 그리고 EBS에서 SBS로 가 부장PD를 하고 있는 남상문씨 등이 보인다)

EBS에서 바둑에 꽃을 피웠다. 어느 시기는 매년 시합에서 등수 안에 들어 상패를 받아 집에 차곡차곡 진열한 적도 있다. 또한 언론인 바둑대회 첫 번째 단체전에서 EBS가 준우승인가를 했는데 9시 MBC 뉴스에 내 얼굴이 나오기도 하였다. MBC가 성적이 좋아 MBC에서 자기 팀 취재를 하면서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간 것이다. 그때 지상파의 힘을 실감했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 우주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요즘 스마트폰을 동반기기(Companion Device)라고 할 만큼 몸에 지니고 다니고 그 속에 빠져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내 생각에 TV 같은 미디어가 촉발한 사이버 세상의 원조가 바둑이라고 본다. 바둑이 바둑돌의 배치로 승부를 겨루는 일종의 기호학의 원류라면 가로세로 19로 바둑판이 만들어 내는 세계는 말 그대로 한편의 서사시요, 대하드라마다. 오큘러스 HMD를 쓰고 가상의 세상을 보고, 소니도 HMD 타입의 가상현실 기기를 만든다고 하지만 오래전부터 바둑을 통해 선조들은 사이버 세상과 공명하고 있었다. 인간의 머리는 보이는 현실 세상의 기호학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의 가상 기호학에 더 매력을 두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 세상을 녹여내었던 것 같다.

바둑을 안 지 35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바둑을 좋아한다. 아직도 주말에 케이블 바둑채널을 즐기고, 바둑책을 보다 잠이 들고, 신문에 바둑칼럼이 있으면 숙독을 해야 하고, 기원 간판을 보면 오래된 벗을 만난 듯 반갑다. 하지만 정작 바둑은 1년에 몇 판 두지 않고 기원 간판은 보고만 지나치고 인터넷으로는 가끔 접속해 다른 사람 두는 것 구경만 한다.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이젠 바둑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충분하다. 이래서 오래된 것들이 좋은가 보다.

입사 후 줄곧 퇴직하고 기원을 하나 여는 게 꿈이었다. 바둑 정신, 영어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건전한 바둑 보급에 일조를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바둑 문화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으로 대거 옮겨갔고 좀 더 액티브한 자극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바둑판을 떠났다. 정도전의 표현대로 밥버러지가 되지 않으려면 퇴직 후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기원이나 어린이 바둑교실이 벌이가 안 될 것 같아 큰일이다. 퇴직하신 장도훈 부장님은 유럽 쪽에는 바둑사범에 대한 수요가 많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고 권했던 기억도 있지만 용기가 않나 접었다. 고민이다. 혹, 이 잡설을 읽어주신 독자 중 좋은 생각이 있다면 연락 바란다. 바둑을 통한 재매개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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