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군의 B급 잡설 – 인생의 회전목마 1

C군의 B급 잡설 – 인생의 회전목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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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대한국민이라면 또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이야기하는 구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물리적 새해(?)의 시작은 신정이지만 우리네 가슴에 깊게 뿌리내린 심정적 새해(?)는 역시나 구정이기에 무언가 어렴풋한 기대가 다시 설레기 시작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할 것 같습니다. 구정이 가까운 타이밍상 거리에 지나는 수많은 타인마저 마음에 달달한 온기를 지피는 듯한 계절이지만, 이제 4학년으로 올라가는 C군(아직 글로벌 스탠다드로는 아홉수에 겨우 진입했습니다만… ^^;)은 나이에 걸맞게 여성 호르몬 수치도 높아지는지 툭하면 삶이 덧없고 속절없는 기분에 석양만 보아도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눈가가 아려오곤 합니다. 아마도 이룬 것은 없고 자꾸 시간은 흘러가는데 여성 호르몬만 혼자 신이 난 탓이겠죠(–;). 현실이 내가 바라던 꿈에서 너무 멀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 누구나 “과거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하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후회에 한 치의 자비도 없는 불가역적인 시간입니다. 아직까지 인간의 지식과 기술로는 한 번 지나간 것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거품처럼 서럽게 삭여야만 하는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사연이 꿈속까지 따라와서 괴롭히는 날이면 천진한 상상의 도움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꿈을 꾸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어서인지 타임머신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았습니다. 타임머신을 소재로 한 영화 중에서 C군 또래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이 ‘백 투 더 퓨처’일 것입니다. 그리고 ‘백 투 더 퓨처’에는 [그림 1]과 같은 아이콘적인 타임머신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또 자동차로 9G 급선회를 하고 있습니다.


   
▲ [그림 1]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타임머신

출처 : whoartnow.hubpages.com

‘백 투 더 퓨처’에 타임머신으로 나왔던 차가 꽤 사연이 복잡한 차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차의 이름은 DMC-12이고, DMC는 [그림 2]의 창업자 존 재커리 드로리언(John Zachary Delorean)의 이름을 딴 Delorean Motor Company의 약자입니다. ‘백 투 더 퓨처’의 타임머신 DMC-12가 어떻게 사연 많은 차가 되었는지는 창업자 드로리언의 인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비운의 스포츠카 DMC-12의 사연에 눈물 흘리기 전에 파란만장했던 천재 존 드로리안의 인생을 먼저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림 2] 존 재커리 드로리안(John Zachary Delorean)

출처 : www.pontiacsonline.com

존 드로리안은 1925년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에서 루마니아 이민자인 아버지와 헝가리 이민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이민자 가정이 대부분 그랬듯이 가난과 불화로 얼룩진 환경에서 유복하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불화 끝에 결국 이혼을 하였고, 술에 찌들어 생활하던 아버지와 드로리언은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교 시절부터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던 드로리언은 유명한 자동차 엔지니어들을 배출한 디트로이트의 로렌스 공과대학(Lawrence Institute of Technology)이라는 작은 대학에 입학을 했으나 1943년 2차 대전에 징집되어 3년간 참전을 합니다. 제대 후에는 생활고로 인해 곧바로 복학을 하지 못하고 디트로이트의 공공 조명을 담당하던 공기업에서 서류작성을 맡아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습니다. 급한 가족의 생계를 해결한 후 다시 대학에 복학하여 학업을 이어가던 드로리언은 학업 중에도 틈틈이 크라이슬러 등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그를 자동차업계로 진출하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게 합니다. 힘겹게 대학을 마친 드로리언은 의외의 선택을 합니다. 엔지니어가 아닌 생명보험 영업에 뛰어든 것입니다. 얼마간의 생명보험 영업 후 공장설비 회사로 직장을 옮긴 드로리언에게 당시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하던 삼촌이 크라이슬러에서 일해 볼 것을 권유했고, 드디어 드로리언은 자동차 업계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당시 크라이슬러는 자체적인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드로리언은 이곳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1952년 크라이슬러에 엔지니어로서 합류합니다(드로리언은 당시 일을 하며 미시간 대학의 MBA를 야간으로 다니기도 했는데 먼 훗날인 1957년에 학위를 획득합니다). 크라이슬러에서 석사도 마치고 엔지니어로 일하게 되었지만 실제 크라이슬러에서의 직장생활은 1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패커드 자동차 회사(Packard Motor Company)로 당시 14,000달러의 연봉을 받고 이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드로리안이 이직을 하던 때는 2차 대전의 종료와 미국 중산층의 부흥에 발맞춰 포드, GM, 크라이슬러 등의 경쟁자들이 합리적인 가격과 품질의 자동차를 출시하던 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패커드 자동차는 이런 흐름과는 반대로 전쟁 이전처럼 고급 승용차 시장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시장의 흐름을 거스르던 패커드 자동차는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여 다른 회사와의 합병을 모색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드로리안은 패커드 자동차에 계속 남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1956년 GM은 16,000달러의 연봉과 함께 드로리안에게 GM 산하 5개 디비전 중에 가고 싶은 디비전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파격적 제안으로 그를 영입하는데 성공합니다. 당시 GM은 쉐보레(Chevrolet), 폰티악(Pontiac), 올즈모빌(Oldsmobile), 뷰익(Buick), 캐딜락(Cadillac)의 5개 디비전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고 세월에 따라 이런저런 변화를 거쳐 2008년 금융위기에 의한 도산 이후 현재 쉐보레, 캐딜락, 뷰익, GMC의 4개 핵심 디비전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당시 5개 디비전에서 드로리안은 폰티악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폰티악에서 여러 가지 혁신적 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며, 1962년 폰티악의 수석 엔지니어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 [그림 3] 폰티악 GTO         출처 : www.fkcarparts.com





폰티악에서 일하며 드로리안이 이룬 성과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폰티악 GTO([그림 3])’의 개발과 성공적인 판매였습니다. GTO는 Gran Turismo Omologato의 약자로써 ‘레이싱 승인을 받은 GT 차량’을 의미하며, 다시 GT는 ‘고속으로 장거리를 주행할 수 있는 차량’을 의미합니다. 그 이름 그대로 ‘폰티악 GTO’는 뛰어난 가속력을 바탕으로 고속으로 장거리를 주행할 수 있는 신 나고 재미있는 차량이었습니다. 이후 ‘폰티악 GTO’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서 여러 브랜드에서 비슷한 류의 자동차들을 속속 개발하여 시장에 투입하였고, 이런 자동차들을 가리켜 이른바 아메리칸 머슬카(Americal Muscle Car)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메리칸 머슬카에 대해서는 C군도 명확한 정의를 모르겠지만 대략 ‘고배기량 8기통 엔진의 높은 토크를 바탕으로 직선코스에서 엄청난 가속을 보여주는 쿠페 스타일의 우람한 미국 자동차’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폰티악 GTO’로 머슬카라는 장르까지 창조하며 거침없는 질주를 하던 드로리안은 1965년 40의 나이에 폰티악의 사장에 임명됩니다. 당시 GM의 디비전 사장들 중에서 드로리안이 가장 젊었습니다.

하지만 회사의 상위 그룹으로 진출하면서 드로리안은 GM 내부의 심각한 정치싸움에 휘말리기 시작합니다. 다른 큰 디비전이 자신들의 실적을 위해서 작은 디비전의 신차개발을 방해하거나 특정 기술을 못 쓰게 하는 등의 세력 싸움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경영진 눈에 가장 젊은 드로리안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고분고분해도 모자랄 판에 옷차림부터 튀고 종종 연예계 인사들과 어울리는 드로리안은 점점 미운털이 박히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집중적인 견제를 받으면서도 드로리안이 치열한 GM의 내부 정치에서도 살아남은 것은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일례로 GM 디비전 중에 맏형격인 쉐보레가 계속 흔들리자 1969년 경영진은 드로리안을 쉐보레의 General Manager로 임명합니다. (General Manager에 대한 적당한 한글 표현이 모호하여 영문 그대로 사용합니다.) GM의 견인차인 쉐보레가 너무 흔들리다 보니 밉던 곱던 경영진은 제일 능력이 좋은 드로리안을 쉐보레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나 드로리안은 1969년 취임 당시 위기에 흔들리던 쉐보레를 2년만인 1971년에 기록적인 3백만 대 판매로 돌려세우며 기염을 토합니다. 1971년 쉐보레의 판매량이 포드 자동차 전체 판매량에 육박할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성과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그림 4] 드로리안 DMC-12                    출처 : www.exoticsportscars.de

위기의 쉐보레를 구해내며 다시 한 번 스타성을 입증한 드로리안은 유력한 차기 GM 회장 후보로 독주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길고 긴 사내 권력투쟁에 지친 것일까요? 드로리안은 1973년 GM에서 사임할 것을 발표합니다. 이를 두고 사실은 “권력투쟁에서 밀려나서 해고당한 것이네”, “해고당하면서 위로금을 두둑이 받았네” 등등의 소문이 있었습니다만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인데 하물며 업계의 톱스타였던 드로리안이 집에 앉아 얌전히 소일이나 하며 세월을 보내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대중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드로리안은 GM에서 사임하며 자신의 이름을 건 회사를 통해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스포츠카를 만드는 일에 착수합니다. 항상 자신이 이상적이라 꿈꾸던 차 DMC-12 ([그림 4])를 현실에서 빚어내는 일을 시작합니다. 다가올 불행을 모른 채로 말입니다.

다음 호에서는 처절했던 드로리안의 사투, DMC-12의 탄생, 그리고 비극적 결말을 전해드리겠습니다.

P.S.

C군의 잡설은 귀동냥에 근거하여 재구성된 것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항상 유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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